제13회 부산국제영화제 뉴커런츠 부문 심사위원 명단에는 젊은 대중들에겐 다소 낯선 한국 이름이 포함돼 있다. 영화학도와 시네필들로부터 이른바 '전설의 여배우'라 불리는 이화시.
1970년대 고혹적이며 반항적인 얼굴로 연적의 눈을 후벼 파는 악녀('반금련'), 시체와의 정사도 불사하는 술집 작부('이어도') 등을 연기하며 김기영 감독 영화의 페르소나 역할을 했던 배우다.
1997년 부산영화제가 김기영 감독 회고전을 열면서 영화계는 이화시를 재발견했고, 그 근황에 대한 영화인들의 궁금증은 마침내 그의 활동재개로까지 이어졌다. 시간에 묻혔던 한 배우가 영화인들의 뒤늦은 관심과 후원을 거쳐 한국 대표 영화제의 심사위원 자리에 앉은 것이다.
이화시는 "김 감독에게 무한한 감사를 드린다"고 했다. 대중의 뇌리에서 잊혀진 배우였던 자신을 되살린 사람은 김 감독이라는 이유에서다. "말 그대로 감개무량하죠. 거장 김 감독님이 계셨기에 세월이 한참 흐른 뒤 제가 재발굴되고, 재조명되고, 영화학도들의 사랑을 받으니 너무 감동적이에요."
생전 김 감독은 이화시를 "얼굴이 퇴폐적이고 색기가 흐른다는 이유로 중앙정보부에 의해 퇴출된 여배우"라고 회고했다. 납득할 수 없는 시련을 뒤로 하고 캐나다로 떠났던 그지만, "단 하루도 제가 영화배우라는 사실을 잊은 적이 없다"고 했다.
"활동을 중단하는 동안…"이라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손사래를 쳤다. "대학원에서 영화연출을 공부하는 딸과 그 동료들의 15분, 30분짜리 단편영화 여러 편에 출연해 왔다"며 그는 현역으로 계속 활동해 왔음을 강조했다.
"제가 뒷마당에 앉아 '대부'에서 말론 브란도가 죽는 장면 등을 떠올리며 영화에 대한 상념에 잠겨있을 때 저희 집에 묵던 한국학생이 제 과거를 모르면서도 그랬어요. '어머 영화 찍는 배우 같으세요.' 참 묘한 게 배우는 한번 하면 평생 하나의 굴레가 되는 것 같아요."
그는 지난해 개봉한 김진아 감독의 할리우드 영화 '두 번째 사랑'으로 소위 제도권에 복귀했다. 현재는 '조선남녀상열지사:스캔들'을 연출한 이재용 감독의 신작 '귀향'에 출연 중이다.
1978년 김기영 감독의 '살인나비를 쫓는 여자'이후 떠났던 충무로에 꼭 30년 만에 복귀한 것이다. "출연 제의가 많이 들어와요. 워낙 제 캐릭터가 평이하지 않아 꼭 필요하다 싶은 작품들에서만 부르긴 하지만요. 이제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 같아요."
김 감독과의 옛 시절을 회고하면서 그의 목소리는 살짝 떨렸다. 그는 촬영 중 김 감독에게 뺨을 맞는 봉변을 당했음에도 "그때 내가 더 잘 할 걸. 제 잘못된 연기를 시인하고 (촬영 못하겠다고) 고집 피우지 말걸. 그게 지금도 정말 죄송스럽고 후회스럽다"고 말했다.
그에게 김 감독은 영화에 대한 집념이 대단한 인물로 기억된다. "대본에도 없는 연기를 현장에서 요구해 배우들을 종종 당황스럽게 했다"고 회고한 이화시는 "'반금련' 찍을 때 밧줄에 거꾸로 매달려 있는데 갑자기 물을 확 뿌리더라고요. 그땐 정말 죽는 줄 알았죠. 윤여정 선배는 '충녀' 촬영 중 감독님이 예고 없이 쥐를 풀어 몸에 떨어뜨렸대요. 미리 알면 작위적인 연기가 나올까 봐 말을 하지 않은 거죠."
'전설의 여배우'는 활동을 재개하며 다부진 각오를 밝혔다. "나이에 걸맞은 역할을 연기하면서 저를 다시 지켜봐 주시는 영화팬들에게 좋은 모습 보이고 싶습니다. 심사위원이든 배우든 영화와 관련된 제 역할을 굳건히 지키다 가겠습니다. 이제 다시는 (영화계를)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부산=글·사진 라제기 기자 wender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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