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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식 칼럼] 버핏형 '인간 지표'는 없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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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식 칼럼] 버핏형 '인간 지표'는 없나

입력
2008.10.07 0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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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병통치약은 아니더라도 지혈제는 됐다는 미국 정부의 긴급경제안정법이 지난 주말 우여곡절 끝에 상ㆍ하원 의결과 대통령 서명을 거쳐 집행만 앞두게 됐다. 이번 구제금융의 규모는 대공황 이후 사상 최대의 금융위기에 걸맞게 7,000억 달러에 달하지만 탐욕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남은 공포는 전염성을 더욱 키우며 좀처럼 진정되지 않는다. 신용도, 신뢰도 모두 잃고 '계급 분노(class fury)'까지 감당해야 하는 월가는 저마다 자기 살기에 바빠 앞으로 닥칠 터널의 깊이와 길이를 가늠할 겨를도 없다.

위기 '집단대응' 이끌 권위 해체

최근 방한한 버지니아대 다든스쿨(경영대학원)의 로버트 브루너 학장은 이를 '죄수의 딜레마' 상황이라고 표현했다. 위기가 닥친 상황에선 정보의 비대칭과 상대방에 대한 불신이 극에 달해 개인이나 기관이 각각의 이익만을 좇아 행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회 전체적인 최적점을 찾으려면 100년 전 금융자본가 J. P. 모건이 그랬던 것처럼 관련 인사와 기관들이 뜻을 모으고 신뢰를 세운 후 '집단 대응(collective action)책'을 마련해야 하는데, 그런 일을 주도할 권위가 실종됐다는 것이다.

권위 해체와 몰락의 최정점엔 앨런 그린스펀 전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이 있다. '세계의 경제대통령'에서 졸지에 '파국을 연주한 마에스트로(거장)'로 전락한 그는 이달 하순 의회 청문회에 선다. '그린스펀 거품'을 초래한 피의자로 정부정책의 잘잘못을 가리는 하원 감독행정개혁위원회에 불려나가는 것이다. 혐의는 재임기간 중 과도한 저금리정책으로 부동산 거품을 부추겼다는 것과 파생상품시장을 규제 사각지대에 두는 데 적극적으로 기여했다는 것 등 두 가지.

1930년대 대공황 연구의 최고권위자로 불리는 벤 버냉키 FRB의장도 망신살이 뻗쳤다. 그는 서브프라임 모기지 부실이 본격적으로 불거진 지난해 여름에도 "금융시장 영향은 제한적"이라고 의미를 축소했다가 사태가 급박해지자 공중에서 돈을 마구 뿌려대 '헬리콥터 벤'이란 별명을 얻었다. 타임지의 예측이 맞다면 그는 재임 중 '70년 전 대공황을 연구해 21세기판 대공황을 재현했다'는 오명을 뒤집어쓸 판이다.

헨리 폴슨 재무장관은 구제금융법안 통과를 위해 의회 지도부에 무릎을 꿇는 것보다 더한 것도 해야 할 사람이다. 골드만삭스 회장 출신인 그는 2000년 신용파산스와프(CDS) 등 고위험 파생금융상품에 대한 규제를 금지하는 '상품선물현대화법'을 만드는 로비의 주역이었다. 기업부도 위험을 사고파는 CDS는 전형적인 카지노 상품으로, 그 규모가 전세계 GDP와 맞먹는 54조 달러에 달해 최근 금융위기의 주범으로 꼽힌다.

그나마 시장 지도력을 보여준 사람은 투자회사인 버크셔 해서웨이 회장인 워런 버핏이다. 7월 초 타계한 존 템플턴과 함께 '가치투자의 귀재'로 불리는 그 역시 구제금융법안의 한계를 알고 있지만 최근 그는 골드만삭스와 GE 등 4개사에 130억 달러를 투자했다. "지금 시장은 6~12개월 전에는 찾을 수 없었던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며 "지금 투자하지 않는 것은 노년을 위해 성욕을 아끼는 꼴"이라는 것이다.

버핏이 산 이들 주식의 가격은 공교롭게도 급락장에서 오히려 오르거나 보합세를 유지해 시장이 정책보다 '인간지표'를 더 신뢰한다는 해석을 낳고 있다. 버핏이 차기 정부의 재무장관 물망에 오른다는 뉴스도 나왔다.

한국판 '카산드라 예언' 경계를

딴 나라 얘기를 길게 한 것은 신뢰란 정책 자체보다 사람에게서 나온다는 이치가 꼭 들어맞아서다. 엊그제 정부는 이례적으로 대외채무의 실상과 외환보유액의 구조까지 공개하며 외화유동성에 대한 불안은 기우라고 일축했다. 그러면서도 800억 달러 규모의 아시아공동펀드 설립 구상을 내놓고 시중은행에 외화유동성 확보를 위한 자구노력을 강조했다. 둘 다 메시지가 잘못 전달되거나 일이 틀어지면 지난번 섣부른 10억 달러 외평채 발행 시도처럼 후유증이 더 큰 내용들이다.

어제 시장은 정부의 말에 전혀 귀 기울이지 않았다. 대전환의 시기에, 낡은 패러다임으로 시장을 주무르는 관료들만 판치는 우리 사회에 카산드라의 불길한 예언이 감돈다.

이유식 논설위원 ys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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