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시55분 4시 방향, 거리 2마일, 중국 운반선 추정 선박이 영해 내측 4마일 지점에 정박했다가 340도 방향으로 8노트 이동 중. 단정조와 검문검색조는 출동하라."
3일 오전 전남 신안군 가거도 북서쪽 29㎞ 해상에 있던 목포해경 3008함에 비상이 걸렸다. 냉동 운반선으로 추정되는 중국 선박이 이유를 밝히지 않고 우리 영해에서 1시간 가량 멈췄다가 항해하는 것을 함정 본부인 조타실에서 포착한 것. 단순한 통행 목적이라면 국적과 무관하게 영해를 지나갈 수 있지만, 정박할 땐 연안국에 이유를 사전 고지해야 한다.
상황을 알리는 긴 부저가 울리고 단정조와 검문검색조 요원 9명이 조타실에 집합했다. 최대 시속 74㎞의 고속단정을 타고 불법 어선을 단속할 요원들이다. 단정조는 운전과 어선 계류를 맡고, 검문검색조는 직접 어선에 올라가 불법 행위 증거 확보와 선장 연행의 임무를 펼친다.
이들은 소총, 권총, 가스총, 전자충격기, 삼단봉 등을 지급 받고 출동 채비를 마쳤다. 박정수 함장은 "저들이 밝힌대로 기관 고장 때문에 정박한 것인지, 운반선을 가장해 밀수품을 운반 중인 것은 아닌지 철저히 검색하라"고 지시했다.
고속단정은 함정에서 내려지기 무섭게 신속히 목표물에 도달했다. 생선을 보관하는 냉동 창고가 설치된, 선원 10여 명의 500톤 급 철선이었다. 선원들은 산둥성 이엔타이(煙台)로 가는 길이라며 순순히 선상에 오를 수 있는 사다리를 내려줬다.
요원들은 먼저 조타실에 들어가 선원들의 여권, 항해 일지 등을 확인했다. 통역 요원이 선장을 상대로 몇가지 사항을 취조하는 동안, 다른 대원들은 기관실에서 실제 고장 수리가 있었음을 확인하고 선실, 창고 등을 샅샅이 살폈다. 20분 간의 집중적 점검 결과 위법 사항은 발견되지 않았다.
이달 1~3일 목포해양경찰서 소속 3008함에 머무는 동안 체험한 유일한 비상 상황이었다. 2박3일 체류 기간 중 다른 중국 어선은 발견되지 않았다. 그들이 주로 조업하는 우리 측 배타적 제한구역(EEZ) 일대에 조기 떼가 사라진 까닭이다.
날씨마저 화창해 바다는 호수처럼 잔잔했다. 하지만 3008함이 경비하는 서해안 남부 해역 4만㎢에는 밀도 높은 긴장감이 감돌았다. 이 구역을 담당하는 또다른 함정인 3003함 대원들이 지난달 23일과 25일 연달아 중국 어민들에게 폭행을 당했다. 박경조 경위는 목숨까지 잃었다.
3003함의 사고로 예정보다 하루 앞선 26일 새벽 비상 출동한 3008호의 근무 기강은 드셌다. 2일 점심식사 직후 느닷없이 중국 불법 조업선이 나타났다는 가상 상황이 부여됐다. 비상 훈련이다. 유사시에 대비해 함정 무장을 갖추고, 고속단정 요원들이 어선 출현 지점까지 출동하는 데 걸린 시간은 단 5분.
특히 고속단정 요원에겐 "선원들이 저항하면 공포탄을 쏘되 위급할 땐 상부 보고 후 실탄을 사용하라. 보고할 여유가 없다면 조장 판단 하에 바로 사용하라"는 지시가 거듭 내려졌다. 외국 어선 검문 지침에 적시된 내용이지만, 3008함 대원들에겐 새삼 묵직하게 여겨지는 지시사항이다.
베테랑 요원들은 서남부 해역이 더이상 해상 폭력의 무풍지대가 아님을 일찌감치 감지하고 있었다. 옥영호 경위는 "올 2, 3월부터 중국 어민들이 폭력적으로 반항하는 일이 부쩍 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최근 불법 조업 어선을 단속하러 갔다가 흉기를 휘두르며 무리 지어 덤비는 중국 어민들과 대치하는 아찔한 사태를 겪었다.
무리하게 선창에 올라갔다간 인명 피해가 생기겠다 싶어서 그들의 폭력적 행태를 촬영해 중국 당국에 처벌을 의뢰하는 걸로 상황을 수습했다.
중국 어민들의 폭력 행위가 도를 넘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위반 행위에 대한 벌금 액수가 큰 폭으로 올랐기 때문. 박 함장은 "2,000만~3,000만 원 정도였던 벌금이 2, 3년새 4,000만~5,000만 원 수준으로 상향됐다"며 "최근 중국 어민들은 배를 나포 당하지 않으려고 동향 어선들끼리 떼지어 출항하고 동료가 위기에 처하면 조직적으로 대응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말했다.
한 함정 요원은 "규정을 위반한 것은 자기들인데도 '중국은 대국, 한국은 소국'이란 우월감을 공공연히 표출하며 공권력 집행을 방해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고 말했다.
저인망 조업이 허가되는 16일 이후엔 서해안에 더욱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 전망이다. 두 배 사이에 그물을 걸고 조업해 '쌍끌이배'로 불리는 저인망 어선 중엔 무허가로 조업하거나 허가량 이상 고기를 잡아들이는 경우가 많다.
대부분 철선이라 들이받으며 저항할 경우 제압하기가 쉽지 않다. 게다가 불법 조업은 단속이 까다로운 겨울철 악천후에 기승을 부린다.
3008함은 7박8일의 출동(경비 해역에 나가는 일)을 마“?1509함과 임무 교대 후 3일 오후 목포 해경 부두에 입항했다. 정박 기간 중에도 대원 61명의 일터는 함정이다. 함정으로 출근해 기계를 정비하고 각종 교육훈련을 실시하면서 다음 번 출동에 대비한 역량을 기른다.
해경 특공대원으로 함정에 근무하는 임경민 경장은 "중국 어선의 불법 조업은 우리 어민의 생계에 대한 중대한 위협이라 여겨 함정 근무를 자원했다"면서 "흉포화하는 중국 어민들의 폭력 행위를 제압할 수 있는 정교한 행동 지침과 장비 보강이 필수"라고 말했다.
해경 3008함상에서 이훈성 기자
■ 해경 3008함 최유란 경장
"중국 어선 단속은 엄청난 기싸움입니다. 배에 오른 우리는 너덧 명이고 선원은 10명쯤 되니까 단숨에 조타실을 장악하고 불법 사항을 찾아내 선장을 연행하지 못하면 예기치 않은 상황에 처할 수 있습니다."
3008함을 타는 두 명의 여경 중 하나인 최유란(27ㆍ사진) 경장은 불법 어선 단속의 최전선에 있다. 상황이 발생할 때마다 고속단정을 타고 출동한다.
뛰어난 중국어 실력으로 2005년 순경 특채된 그녀의 임무는 중국 선원에게 불법 행위 적발을 통보하고, 함정으로 연행한 선장에게 자인서를 받아내는 일. 이같은 내용의 1차 조사를 끝낸 뒤엔 선원과 선박을 목포해양서에 인계한다.
함정 근무 9개월 동안 최 경장이 속한 검문검색조가 나포한 중국 어선은 10여 척. 그 중 대여섯 척은 무허가 조업 중 붙잡힌 경우다. 최 경장은 "무허가 어선은 무조건 나포 대상인데다 고액 벌금을 물어야 해서 도망치거나 심하게 저항하는 일이 잦다"고 말했다.
불법 조업은 기상이 나쁠 때 이뤄지는 게 보통이라 도주하는 어선을 쫓기란 쉽지 않다. 올라타긴 더 어렵다. 몸집 작은 고속단정이 2m 넘는 파도에 실려 어선 높이만큼 솟구치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건너뛰어야 하기 때문이다.
바닷물을 뒤집어쓴 무거운 장비를 장착한 채 달리는 중국 배 선창으로 몸을 던지는 경험을 최 경장도 세 번쯤 겪었다. 이런 날은 파도와 엔진 소음 속에 정지 명령을 거듭 내지르느라 여지없이 목이 쉰다.
중국인 선장 중엔 글을 모르는 사람이 많아 조업 규정에 대한 지식이 모자라다. 최 경장은 "자인서에 제 이름도 못 쓰는 경우가 3분의 2쯤 된다"며 "어떤 위반 행위를 했는지 아무리 설명해도 못 알아들으니까 난감하다"고 말했다.
선장 자리에서 쫓겨나지 않게 한 번만 봐달라고 읍소하는 일도 흔하다. 하지만 이런 하소연은 거짓 진술을 가리려는 술책인 경우가 많아 주의해야 한다.
최 경장은 "중국 해역 내 조업이 워낙 포화 상태라 우리 측 EEZ를 허가 없이 침범하는 어선이 꾸준히 생긴다"며 "중국 당국이 조업 허가를 엄격히 내주고 출항 전 교육을 강화하고 있지만 우리로선 한시도 마음 놓을 수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훈성 기자 hs0213@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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