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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로 여는 아침] 상한 영혼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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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로 여는 아침] 상한 영혼을 위하여

입력
2008.10.06 0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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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희

상한 갈대라도 하늘 아래선

한 계절 넉넉히 흔들리거니

뿌리 깊으면야

밑둥 잘리어도 새순은 돋거니

충분히 흔들리자 상한 영혼이여

충분히 흔들리며 고통에게로 가자

뿌리 없이 흔들리는 부평초 잎이라도

물 고이면 꽃은 피거니

이 세상 어디에서나 개울은 흐르고

이 세상 어디서나 등불은 켜지듯

가자 고통이여 살 맞대고 가자

외롭기로 작정하면 어딘들 못 가랴

가기로 목숨 걸면 지는 해가 문제랴

고통과 설움의 땅 훨훨 지나서

뿌리 깊은 벌판에 서자

두 팔로 막아도 바람은 불 듯

영원한 눈물이란 없느니라

영원한 비탄이란 없느니라

캄캄한 밤이라도 하늘 아래선

마주잡을 손 하나 오고 있거니

고통과 설움의 땅에 뿌리를 내렸으니 얼마나 상처를 많이 받았으랴. 하늘에 백발을 풀어헤치고 신음하는 갈대가 흔들린다. 갈대가 흔들리면서 흘린 눈물이 아마도 부평초의 못이 되었으리라.

흔들린다는 것은 통곡이 몸으로 흘러넘쳐 일으키는 위태로운 지진과 같다. 그런데 고통스런 이 흔들림이 뿌리를 더 깊게 내리는 힘이 되고 있다. 고독과 소멸은 어차피 지상의 조건, “가자 고통이여 살 맞대고 가자”, 고통을 벚 삼아 간다면 가지 못할 곳이 없다.

상처에 등불을 켜는 이 건강한 낙천주의는 ‘뿌리 깊은 벌판’과 ‘마주 잡을 손 하나’에 대한 믿음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이 믿음이 갈대를 충분히 흔들리게 하고, 부평초에게 꽃을 피우게 한다.

막막한 한 시절 누군가 울고 있다. ‘마주 잡을 손 하나’를 애타게 기다리며 흔들리고 있다. 비탄에 젖어 서걱이는 그 뿌리를 온 벌판이, 아니 온 대지가 꼭 붙든 채 놓지 않고 있다.

손택수ㆍ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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