늪은 푹 젖은 땅이다. 호수도 아니고 맨땅도 아닌 모호한 경계의 중간자적 형태다. 아마도 복잡다단한 세분화가 이뤄지기 전 시원의 생명이 이런 모습이었을 것이다. 생명이 콜로이드 상태로 끈적거리며 녹아 있는 곳. 그걸 한 음절로 축약한 것이 바로 늪이다.
여명도 없는 캄캄한 새벽을 달려 도착한 곳은 국내 최대 천연 늪지대인 경남 창녕의 우포다. 1억4,000만년 전 생성됐다는 231만㎡ 면적의 우포는 습지의 소중함이 알려지면서 세상의 큰 관심을 얻게 됐다. 하지만 정작 그 옆에서 나고 자란 주민들은 우포란 이름이 생소하다.
그들은 '소벌'로 불러 왔는데 왜 남들은 아무 생각 없이 우포라 부르는지 개운치 않다. 소벌의 일본식 한자 표기 우포가 람사르 총회 등을 거치며 공식 명칭으로 굳어진다는 것을 몹시 불쾌해했다.
우포는 모두 4개의 늪으로 이뤄져 있다. 가장 큰 늪이 소벌(우포)이고 그 옆에 나무벌(목포), 모래펄(사지포), 쪽지벌이 같은 물줄기에 붙어 있다. 어둠을 뚫고 도착한 곳은 나무벌과 소벌의 경계인 목포제방. 아무도 없는 제방을 거닐며 새벽의 늪과 조우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여명이 비치자 늪은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빛이 밝아지는 정도에 따라 풀섶에서 잉잉대는 풀벌레 소리도 함께 커져 갔다. 생명의 숨소리가 낮게 깔려 물안개 대신 늪 위를 자욱하게 덮었다.
늪의 아침을 사진에 담으려는 이들이 하나 둘 제방에 몰려들었고, 물 위에 펼쳐진 아름다운 초원을 바라보며 카메라 렌즈를 들이댔다. 마침 쪽배를 타고 늪의 새벽 순찰을 나섰던 '우포 지킴이' 주영학(60) 씨를 만났다.
많은 사진 마니아들이 물안개는 언제 피느냐고 묻자 주씨는 "쓰리가 와야 칸다"고 했다. 늪처럼 탁한 그의 억센 사투리 때문에 뭔 뜻인지 감이 오질 않았다.
"산천의 풀이 녹아 내리야 물안개가 피어 오른다"는 그의 보충 설명에 그제서야 '서리가 와야 한다'는 이야기란 걸 알게 됐다. 주씨는 우포를 가리키며 "갈수록 풀과 덤불이 늘어나 늪이 육지화하고 있다"며 "그 속도가 무척 빠르다"고 걱정했다.
생명의 습지인 우포는 다양한 생물의 보금자리다. 희귀한 새는 물론 삵과 고라니 멧돼지 등 동물도 이 늪을 근거지로 살고 있다. 주씨는 "최근 수달을 닮은 외래종 누테리아가 늪의 물고기를 다 잡아 먹고 다닌다"며 "올 들어 내가 100마리 넘게 잡았지만 번식력이 워낙 좋아 골치"라고 했다.
주씨는 쪽지벌의 가시연꽃밭으로 안내했다. 15년 만에 가장 많은 가시연꽃이 피어 장관을 이루고 있는 곳이다. 그의 쪽배를 타고 늪 안으로 들어가 보니 지름이 1,2m가 넘는 동그란 가시연꽃 잎이 늪을 가득 덮었다.
시인 이하석은 <늪을 헤매는 거대한 수레바퀴> 에서 우포의 가시연꽃 잎을 보고 "그 큰 잎은 무수한 살이 박힌 바퀴처럼 당당하다. 너무나 당당해, 그 바퀴를 굴리면 흡사 거대한 공장처럼 이 늪의 모든 것이 일사불란하게 가동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고 했다. 늪을>
연 잎엔 온통 가시가 박혀 있다. 붉은 보랏빛의 연꽃이 꽃다발처럼 한데 모여 피어난다. 가시가 피워낸 아름다움 때문일까. 그 빛은 더욱 선명하다.
가시연꽃 구경을 마치고 둑 위로 올라왔을 때다. 잠어실 마을 사신다는 한 할머니가 저편 물길을 보고 "순둥아"를 외쳐댄다. 강아지가 삵을 잡겠다고 달려가선 한참을 대치 중이란다. 개 짖는 곳으로 시선을 모아 봤지만 수풀에 가려 잘 보이질 않는다. 가시덤불을 헤치며 도랑을 따라 가까이 다가갔다.
짖는 개 앞에서 미동도 없이 노려보기만 하는 삵이 보였다. 눈가에 난 주름을 보니 삵이 분명했다. 새벽 늪에서 헤엄을 치다 체온이 떨어져서인지 힘이 쭉 빠진 모습이지만 눈빛은 날카로웠다.
인기척에 고개를 돌린 삵은 안간힘을 쓰고는 뒤편의 수풀 속으로 기어들어갔다. 장시간 대치를 벌이던 순둥이는 결국 더는 못 기다리겠다며 떠난 제 주인을 좇아 마을로 뛰어가 버린다. 카메라 렌즈만이 흔들리는 수풀 너머 살아 있는 야생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었다.
■ 28일부터 람사르 총회
28일부터 경남 창원에서 제10회 람사르 총회가 열린다. '환경올림픽'으로 불리는, 손꼽히는 세계적인 행사다. 습지 보호를 위한 람사르협약 회원국들이 협약 이행을 촉구하고 실행 지침을 마련하기 위해 3년 주기로 연다.
아시아에서는 1993년 일본 구시로 총회에 이어 두 번째다. 올해는 165개 회원ㆍ비회원국 정부 대표와 국제기구 및 NGO 관계자 등 2,000여 명이 참가하는 역대 최대 규모다.
28일 개회식을 시작으로 8일간 열리는 총회 기간, 습지의 보전과 현명한 이용을 위해 다양한 의제들을 논의한다. 협약 가입 국가들의 습지 관리를 강화하는 창원 선언문도 채택할 예정이다.
주요 행사는 창鞭?창원컨벤션센터 등에서 열리지만 가장 큰 관심을 받는 곳은 바로 우포다. 람사르 등록 습지인 우포를 찾는 공식 생태 탐방이 진행된다. 우포가 한국을 넘어 세계적인 습지로 이름을 떨칠 기회다.
창녕=글·사진 이성원기자 sungwo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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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통이 물씬 성씨古家엔 '노블리스 오블리제' 향기가
우포와 5km 거리인 대지면 석동마을에 창녕을 대표하는 전통가옥 '성씨 고가'가 있다.
창녕군 문화관광해설사인 김량한(39)씨는 "1850년에 이곳에 입향, 터를 잡은 지 그리 오래 되진 않았지만 창녕의 역사에 큰 방점을 찍은 가문"이라고 했다.
기와 지붕이 첩첩 이어진 모습이 멀리서 보면 마을 같아 보이는 이 곳은 입향조 이후 4대에 걸쳐 분가를 하며 지어진, 4대 소가가 모여 있는 고가다. 바라보이는 모든 들판이 이 집 땅이었던 만석지기 가문이면서도 주변에 선행을 많이 베푼 '적선지가(積善之家)'로 인정받고 있다.
성씨 고가는 양파의 시배지다. 창녕군 농민들의 효자 상품인 양파는 이 가문을 통해 전파됐다. 김씨는 "성낙안 선생이 1909년 국내 처음으로 양파 종자를 들여왔고, 아들인 성재경 선생이 재배와 씨앗 거두는 것을 체계화해 이웃 농민들에게 전파, 제2의 소득원을 얻게 했다"고 설명했다.
성씨 가문은 일제시대 사비를 털어 집 바로 앞에 '지양강습소'라는 학교를 세워 일제에 의해 강제 폐쇄될 때까지 인재 양성에 나섰고, 새마을운동보다 10년 앞선 1963년에는 경화회를 조직해 농민 계몽과 농업 기술 보급 운동을 펼치기도 했다.
한국전쟁 후 상당 부분 소실됐던 고가는 최근 후손들이 대부분 복원해 옛모습을 찾고 있다. 복원된 고가는 대청마루에 보온을 위해 유리를 댄 열창을 내고 안채에 화장실을 붙여 짓는 등 근세 한국 건축의 특징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고가 복원에 앞장서는 영원무역 성기학 회장은 "2,3년 내 복원이 마무리되면 고가를 지역문화 발전과 환경운동에 도움이 되는 공간으로 적극 활용할 계획"이라고 했다.
창녕=글·사진 이성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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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억새꽃 일렁이는 화왕산, 용선대서 욕심·번뇌 띄워 보내
창녕은 불과 물의 땅이다. 우포가 물이라면 불꽃 모양 산세를 가진 화왕산(해발 757m)이 그 상대인 불이다. 창녕 사람들은 화왕산이 있어 물의 범람을 막을 수 있었고, 우포가 있어 화왕산의 화기를 누를 수 있었다고 한다. 불과 물이 상생하는 땅이다.
화왕산 정상은 용암을 분출한 칼데라 같은 모양의 거대한 분지로 이뤄졌다. 그 능선을 따라 가야시대 지어진 산성이 있다. 봄엔 진달래 철쭉으로 꽃불이 타들었던 정상의 사면은 지금 부수수 가을빛을 그려내는 억새꽃이 가득하다.
화왕산 등산로 중 창녕 읍내의 자하곡 매표소에서 오르는 길이 가장 빠르지만 경사가 가팔라서 무척 힘들다. 산 뒤로 돌아가 옥천 매표소를 이용하면 시간은 많이 걸려도 좀 더 편하게 오를 수 있다.
옥천계곡 인근에는 관룡사란 사찰이 있다. 관룡산 병풍바위 밑에 자리잡은 천년 고찰이다. 원효대사가 화왕산 정상에 있는 연못에서 9마리의 용이 승천하는 것을 보고 지었다는 절이다. 관룡사의 하이라이트는 대웅전이 아니라 절 마당에서 500m 산길을 올라가 만나는 용선대다.
불가에서 반야용선(般若龍船)은 중생을 구제해 극락세계로 인도하는 상상의 배를 말한다. 관룡산 중턱에 툭 튀어나온 배를 닮은 바위 용선대에 커다란 석불(보물 제295호)이 모셔져 있다. 한 땀 한 땀 걸음으로 용선대까지 오르는 숲길은 세속의 먼지를 땀으로 씻어 내고, 솔바람에 날려 보내는 수도의 길이다.
번뇌를 씻으며 올라가 만난 용선대. 돌배 위에 올라 앉은 석불의 얼굴엔 중생을 굽어 살피는 온화한 미소가 가득했다. 용선대에 함께 온 창녕군 문화관광해설사 김량한(38)씨는 "석불이 일제 강점기에 누군가에 의해 방향이 90도 틀어진 것 같다"며 석불 좌대를 가리켰다.
좌대와 바닥의 좌대를 놓기 위해 깎인 부분의 길이가 서로 달랐다. 지팡이를 이용해 그 길이를 재니 석불의 좌대를 90도 방향을 바꾸면 딱 들어맞는 길이였다.
김씨는 "중생을 구제하는 데 반야용선의 뜻이 있다면 불상은 지금처럼 일본이 있는 동쪽을 바라볼 게 아니라 중생들이 마을을 이루고 사는 남쪽을 굽어보고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반문했다.
석불 앞 불공을 드리는 공간도 남쪽으로 향했을 때 비로소 여유를 찾게 된다고 설명했다. 지역 역사연구회를 중심으로 용선대 석불 제자리 찾기 운동을 벌인다고 하니 그 결과를 지켜볼 일이다.
불상의 뒤편엔 보통 광배가 있기 마련. 지금의 방향에선 없는 광배를 90도 틀어서 보면 건너편 산자락의 바위가 정확히 광배의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 광배가 될 바위에 올라서 용선대를 내려다 보면 산 아래 마을과 반야용선의 석불이 얼마나 잘 조화를 이루는지 알 수 있다. 마치 바위 배가 둥실 하늘로 떠오르는 듯한 착각에 빠져든다.
관룡사 입구의 마주보고 있는 돌장승 한 쌍도 놓치지 말아야 한다. 2003년 태풍 '매미'에 산사태가 나 돌장승이 쓸려 내려갔을 때 이야기다. 주민들이 서둘러 복구하러 찾아가 보니 돌장승 하나가 종적을 감췄다.
태풍 피해를 틈타 도굴꾼이 가져간 것이다. 김씨는 "지역 역사 연구인들이 주축이 돼 발빠르게 전국을 수소문했고 3개월 만에 충남 홍성에서 찾아내 제자리에 돌려 놓았다"고 했다. 천만다행이었다.
창녕=글·사진 이성원기자 sungwo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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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녕, 가야의 숨결 손에 잡힐듯
창녕읍은 경주의 축소판이다. 조그만 읍내이지만 그 안에 국보가 2점, 보물이 8점, 사적이 4점 등 문화유적이 즐비하다. 천천히 읍내를 산책하면 그 유적들과 조근조근 역사의 대화를 나눌 수 있다.
창녕은 가야국 중 하나인 비화가야가 둥지를 틀었던 곳. 다른 가야국과 달리 유일하게 낙동강 동쪽에 있던 나라였다. 신라는 금관가야 다음으로 비화가야를 점령하고는 이곳을 서진의 거점으로 삼았다. 읍내에 진흥왕척경비(국보 제33호)가 있는 이유다.
창녕경찰서 인근 만옥정공원에 모셔져 있다. 진흥황척경비와 가까운 곳에 얼음을 보관하던 창녕석빙고(보물 제310호)가 있고, 소담스러운 가야 고분군 옆에는 비화가야의 화려한 역사를 유물로 증명하고 있는 창녕박물관이 있다.
창녕의 또다른 국보인 '술정리 동삼층석탑(국보 제 34호)'는 경주 불국사의 석가탑과 매우 흡사하다. 석가탑을 모방해 쌓은 탑으로 추정된다. 잘 빠진 여인의 몸매를 보는 듯 늘씬하니 시원하게 뻗었다.
■ 여행수첩/ 창녕
● 우포는 크기가 큰 만큼 탐방 코스도 여럿이다. 가장 일반적인 것은 세진리 우포늪 생태관 앞에 차를 두고 걸어서 대대제방이나 우포늪 전망대 등을 둘러보는 코스다.
● 우포의 일출 포인트는 목포제방 아래다. 생태관 반대편인 대지면으로 해서 1080번 지방도로를 타고 오면 이방면 조금 못미쳐 나무벌 옆으로 늪을 따라 난 비포장길로 차가 들어갈 수 있다. 쪽지벌까지는 차량 통행이 가능하다.
● 숙박 시설은 창녕읍이나 온천 관광지인 부곡에 잘 갖춰져 있다. 부곡은 섭씨 78도의 유황 온천수를 매일 6,000톤 뿜어낸다. 국내에서 가장 뜨거운 온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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