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992~93년 스페인은 지독한 경제위기에 시달렸다. 재벌에 대한 대출집중, 위험사업 진출 등으로 금융도 뒤따라 위기에 직면했고, 은행간 인수합병(M&A)과 뼈를 깎는 구조조정이 따라붙었다.
생존이 유일한 미덕이었다. 그러나 세계 73위, 자국 6위(90년 기준)에 불과했던 산탄데르은행(현 BSCHㆍ방코산탄데르센트랄히스파노)은 절망이 짓누르던 이베리아반도를 박차고 나섰다. 언어(스페인어)와 문화가 엇비슷한 중남미가 타깃이었다.
전략적 계산은 적중했다. 95년부터 차츰 세를 넓힌 산탄데르는 남미의 숙적(센트랄히스파노은행)을 휘하에 두더니 2004년 영국 6위 은행 '아비내셔널'까지 집어삼켰다. 손에 쥔 무기라곤 상업은행 업무의 기초인 소매금융이 전부. 대세로 각광 받던 투자은행(IB)업무는 관심 밖이었다.
그러나 15년이란 짧은 기간에 세계화 완성, 세계 8위 은행(지난해 총자산 1,300조원) 도약을 이룰 만큼 기본의 힘은 무서웠다. 최근엔 몰락한 월가의 점령군 후보로까지 자주 거론된다.
#2. 호주의 IB 맥쿼리는 사업구상을 담은 마스터플랜이 없다. 전세계를 돌며 그때그때 시장이 원하는 수익성 높은 틈새만 집요하게 노렸다. 먹이를 쫓는 매와 같다.
각국 금융회사가 상업금융을 중국진출의 핵으로 여겼지만 맥쿼리는 거들떠보지 않았다. 대신 강점을 살려 도로 공항 항만 등 인프라투자와 부동산개발, 리스에만 공을 들이고 있다. 69년 직원 3명으로 시작, 여전히 호주 내에선 고작 5위 수준이지만 세계 금융시장은 '인프라펀드의 귀재'라고 칭송한다.
#3. '아시아 금융허브' 싱가포르는 2000년 이후 도전에 직면했다. 20년 성장가도를 달렸지만 홍콩 도쿄 상하이 등 경쟁자가 나타나자 성장이 정체된 것. 세계 100위안에 드는 금융회사가 없던 터라 해외진출도 쉽지않았다. 그래서 가동한 게 금융업 해외진출 삼각편대다.
1편대 싱가포르개발은행(DBS)이 태국 홍콩의 은행을 인수하는 사이 2003년부터 국부펀드 테마섹(2편대)은 해외은행에 지분투자를 집중했고, 2006년엔 영국의 스탠다드차타드은행의 경영권을 장악(최대지분 인수)해 중동 아프리카 진출의 첨병역할(3편대)을 맡겼다.
'금융수출'의 역할모델은 이밖에도 많다. 월가의 글로벌 IB 몰락과 더불어 '한국판 골드만삭스' 구상이라는 상징도 무너졌으니 금융수출 자체를 부정해야 한다는 논리는 어불성설이다. 전문가들은 "애초 (금융수출을) 해본 적도 없는데 자제하고 말 것도 없다. 오히려 위기인 지금이 나갈 기회"라고 입을 모은다.
금융수출은 해외 금융회사의 인수합병(M&A), 지분투자, 전략적 제휴, 해외 진출, 기업 금융서비스, 온갖 신상품 개발 등을 아우르는 개념이다. 이는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자 국가경제 발전을 위한 도약의 발판이다.
무엇보다 제조업으로 다져진 '수출강국'의 균형을 찾아야 한다. 제조업(제품수출)의 한계를 극복할 고부가가치 산업인 금융(금융수출)이 함께 가지않으면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의 위상도 절름발이 신세라는 것이다.
박동창 한국글로벌금융연구소 소장은 "GDP 대비 금융 비중이 50%대인 룩셈부르크, 10~30%를 차지하는 선진국과 비교해 우리는 8%수준"이라며 "좁은 국내를 벗어나 무궁무진한 시장이 존재하는 해외로 나가지않으면 갈수록 경쟁에서 뒤쳐질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금융수출은 일자리 창출과 경제성장을 위한 해법이기도 하다.
더구나 국내 금융시장은 이미 성장의 한계에 다다랐다. 은행의 순이자마진은 갈수록 줄어들고, 증권사의 1인당 순이익도 나빠지고 있다. 그런데도 국내 은행들의 해외자산 비중(2%대)은 세계 30대 은행(40%대)에 크게 뒤지는 상황이다.
전효찬 삼성경제연구소 연구원은 "단순한 논리지만 우리나라 금융회사의 자산이나 매출을 아무리 합쳐봐야 세계 50위 안에도 못 든다"며 "삼성전자 같은 글로벌기업처럼 경제 위상에 걸맞은 글로벌금융회사가 나오려면 답은 금융수출"이라고 말했다.
위험을 분산(집중화 리스크 해소)하는 측면에서도 금융수출은 필요하다. 서병호 금융연구원 연구위원은 "외환위기나 카드사태 등이 일시에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은 이유는 모든 자산이 국내에만 집중돼 있었기 때문"이라며 "포트폴리오 다변화 차원에서라도 해외진출은 의미가 있다"고 설명했다.
외환위기 직전인 90년대 중반 종금사를 위시한 우리 금융회사의 무모한 해외진출은 참패로 막을 내렸다. 하지만 지금은 금융수출에 나설 충분한 조건과 능력을 갖추고 있다.
박동창 소장은 "외환위기 이후 구조조정과 내부 경영관리체제 혁신, 신용 및 위험관리 시스템의 선진화 등으로 선진국 은행보다 부실비율은 낮추고 수익률은 높아졌다"며 "IT 인터넷뱅킹 등 세계적인 경쟁력을 확보한 분야도 있는 만큼 망설일 이유가 없다"고 강조했다.
이제 글로벌 IB의 몰락은 반면교사(일부 파생상품 맹신, 도덕적 해이)로 삼되 금융수출의 본보기인 다른 스승들의 철학과 원칙은 배워야 할 때다. 금융수출의 강자들은 90년 동유럽 개방, 95년 중남미 개방, 2000년 아시아시장 개방 등 기회를 놓치지않고, 각자 처지와 강점을 살린 해외 M&A와 투자전략으로 승부해 글로벌금융회사로 우뚝 섰다.
꼭 '한국판 골드만삭스'가 아니더라도 '한국판 OO글로벌금융회사'라는 상징은 만들기 나름이다. '한국판 BSCH(특화형)=소매금융 상품과 서비스는 국내 은행의 강점' '한국판 맥쿼리(틈새형)=선진 IB보다 기법과 규모가 뒤진 국내 증권사의 특화전략' '한국판 삼각편대(연합형)=금융허브를 지향하는 우리 금융정책' 등이다.
문제는 타이밍인데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다. "산업은행의 리먼브러더스 포기 후 국내 금융회사의 입질, 해외에서의 콜이 싹 사라졌다. 하다못해 월가의 무너진 회사 빌딩이라도 살 수 있을 텐데, 엄두조차 못 내고 있다"(정부 관계자), "당장 글로벌 IB를 사는 건 시기상조지만 격이 떨어지는 중소형 회사라도 시도를 해야 하는데 안타깝다."(전효찬 연구원)
우리가 금융수출의 당위성에 대해 의심하는 사이 일본 등 경쟁자들은 벌써 분주히 움직이고 있다. "시점을 놓치면 그만큼의 시간을 또 허비해야 한다"(박동창 소장)는 점을 잊어선 안 된다.
■ 한국 금융에 부족한 3가지
최근 몇 년간 해외진출을 비롯한 '금융수출'은 국내 금융회사의 화두였다. 너나없이 해외거점 확보에 나섰다.
덕분에 올 3월 기준 은행 증권 보험 카드 등 국내 금융회사의 해외점포는 총 255개(지점 75개, 현지법인 83개, 사무소 97개 등)로 늘었다. 해외영업 당기순이익도 2002년(2.1억달러)보다 두 배 이상 증가했다. 소매금융뿐 아니라 투자은행(IB)업무 등으로 보폭도 넓혔다.
그러나 아직 걸음마 단계에 그친다는 지적이 많다. 중심을 잡고 세계시장을 종횡무진하기 위해선 '3부족'을 극복해야 한다.
먼저 대형화와 전문성 부족이다. 현지법인과 지점 형태만으로는 결코 글로벌 플레이어가 될 수 없다. UBS ABN암로 등 유럽의 대형은행은 자국 내 금융산업이 성장의 한계에 직면하자 해외로 눈을 돌린 뒤 인수합병(M&A)으로 규모를 키웠다.
단 백화점식이 아닌 전문화를 추구했다. 씨티그룹과 BSCH(소비자금융), 골드만삭스와 메릴린치(IB업무) 등은 아무리 덩치가 커져도 정체성을 잃지 않았다.
우리는 제대로 된 M&A도 못해봤으면서 IB 등 온갖 걸 다하겠다는 식으로 욕심만 부리고 있다. 조희재 삼성경제연구소 연구원은 "우리 같은 중소 금융회사들은 전문 영역을 먼저 선택한 뒤 추가합병을 통해 대형화를 도모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박동창 한국글로벌금융연구소 소장은 "국민은행의 카자흐스탄 센터크레디트은행 인수가 유일한 해외 M&A라고 볼 수 있지만 미진하다"며 "최근의 글로벌 위기는 국내 금융회사 역사상 한번도 없었던 해외 M&A를 시작할 기회"라고 주장했다. "미국의 지방은행이나 웬만한 규모의 은행도 이참에 들여다보자"고 덧붙였다.
현지화도 미흡하다. 지금까지 국내 금융회사의 해외진출은 국내 기업을 뒤따라 들어가 현지 교포와 주재원을 상대로 한 반쪽 영업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다 보니 현지인력 채용비율도 국내 은행(52%)이 국내 외국계 은행(98%)에 미치지 못하는 실정이다. 외환위기 방지 차원에서도 현지인, 현지기업을 상대로 한 영업현지화가 필요하다.
특히 선진 금융회사가 금융수출에 나선 이유 중 하나가 자국 기업에 대한 금융서비스 제공인 만큼 우리도 금융이 '뒤따라 가는' 형태에서 '어깨 걸고 가는' 방식으로 바뀌어야 한다.
제조기업은 현지 네트워크를 활용해 금융기관 해외진출을 지원하고, 금융회사는 M&A 자금제공 등을 통해 제조기업의 해외진출을 돕는 식이다.
지난해부터 국내 엔지니어링업체와 국내 금융회사간 컨소시엄을 지원하며 금융수출을 이끌고 있는 수출보험공사의 역할을 눈여겨볼만하다.
진출 지역의 범위 역시 부족하다. 박재하 금융연구원 부원장은 "아시아 등에 집중된 '쏠림 현상'(herd behavior) 때문에 해외에서도 국내 금융회사간 경쟁이 과열되고 진출국의 국가위험이 국내 금융시장에 그대로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우려했다.
우선 지역 맹주(리저널 플레이어)가 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일 수도 있으나 지역별 진출전략엔 차별을 둬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고찬유 기자 jutda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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