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한 겸손을 떨진 않겠다. 나는 신을 믿지 않는다. 불행스런 일 앞에서 그 무신론이 기우뚱거린 적도 있긴 했다. 그럴 때면, 어쩌면 신이 있을지도 몰라, 하며 불가지론자 시늉을 하거나, 이놈의 신은 딴 데 정신 팔려 제가 만든 세상엔 무심하군, 하며 이신론자 시늉을 했다.
그러나 전지전능하고 지선(至善)한 신의 존재를 믿어본 적은 한 번도 없다. 불가지론자 시늉이나 이신론자 시늉도, 가늠할 길 없는 세상사에 절망해 잠시 비틀거린 것일 뿐, 그 유혹이 내 무신론에 금을 내진 못했다. 눈앞의 일상적 비참을 보면서도 전지전능하고 지선한 신을 믿는 사람들의 그 맹목이 나는 부럽다.
리처드 도킨스의 경멸과 조롱
'부럽다'는 말은 비아냥거림이 아니다. '이 무한한 공간의 영원한 침묵에 두려움을 느끼는' 인간이, 비록 생각할 줄은 안다 해도 '갈대'에 불과한 인간이, 제 운명의 상승을 어떤 초자연적 존재에게 빈다고 해서 그걸 탓할 수는 없다. 영국인 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가 <만들어진 신> (원제의 뜻은 <신[神]이라는 망상> )이라는 책에서 펼친 주장을 나는 거의 받아들인다. 신[神]이라는> 만들어진>
그러나 나는 도킨스가 그 책에서 성직자나 신자들에게 보인 경멸과 조롱에까지 동의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내 무신론이 도킨스의 무신론보다 여려서가 아니라, 동류에 대한 내 연민이 계몽을 향한 도킨스의 열정보다 더 크기 때문이다. 이 대목에서 나는 도킨스보다 더 거만하다.
기도하는 사람들을 볼 때 나는 경건해진다. 도킨스라면 그들 앞에서, 그들의 '무지(無知)'와 '미몽(迷夢)' 앞에서, 눈살을 찌푸리며 혀를 차리라. 그러나 나는 기도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담겼을 간절함과 순박함에 가슴이 저리다. 그들을 슬기로운 사람이라 여기지는 않지만, 아름다운 사람이라 여긴다. 그 기도가 평화나 박애 같은 공적 가치를 위한 것일 땐 특히 그렇다.
그러나 기도하는 사람 모두가 내 눈에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대입 수능이 한 달 여 앞으로 다가왔으니, 자식이 시험을 잘 치르게 해주십사고 기도하는 어머니의 사진을 어느 신문이든 한두 번은 곧 1면에 실을 게다. 나는 제 자식의 '시험 운'을 위해 곡진하게 기도하는 이 '헌신적' 어머니들의 사진이 역겹다. 그들 가운데 자식이 애쓴 만큼만 이루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어머니는 거의 없을 것이다. 그들 대부분은 자식에게 '덤의 운'이 따르기를 기원할 것이다.
그들의 기도가 추한 것은, 기도라는 그 정결한 옷 안에 탐욕이라는 때투성이 몸이 감춰져 있기 때문이다. 제 자식을 축복하는 기도를 통해 이웃들의 자식에게 저주를 내리기 때문이다. 나 자신 그런 역겨운 기도의 유혹에서 완전히 자유로웠다고 말하지는 않겠다. 그러나 그 사실이 이런 기도가 역겹다고 털어놓을 자격을 내게서 빼앗는 것은 아니리라. 어쩌면 그 기도는 지독한 사랑의 기도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 때의 사랑은 미친 사랑일 것이다. 그 사랑은 제 자식의 동년배들을 향한 미움의 다른 이름일 테니까.
괴물의 탄생과 파시즘의 유혹
최근 교육 당국은 '국제중학교'라나 뭐라나를 통해서, 이 미친 사랑의 기도를, 저주의 기도를 초등학생 부모들에게까지 강요하기 시작했다. 이제 대한민국은 24시간 기도 소리가 울려 퍼지는 '하나님 나라'가 될 모양이다. 그런데 이 하나님은 돈 많은 자들의 기도에만 귀를 기울이시는 이상한 취향을 지니셨다.
그리하여 한국에선, 경제학자 우석훈이 근저 <괴물의 탄생> 에서 지적하듯, 주거공간의 분리, 시장의 분리와 더불어 교육의 분리가 빠르게 진행될 참이다. 국가와 사회가 시장에 고스란히 포섭된 상태를 뜻하는 '괴물'이 우석훈의 우려대로 파시즘행 통로를 낼지 어쩔지는 모르겠다. 괴물의>
슬프게도 이 괴물이 태어난 것은, 우석훈에 따르면, '삼성을 위한 정권'이었던 노무현 '좌파' 정권 때 일이다. 날은 이미 저물었는데, 갈 길은 아득하다.
고종석 객원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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