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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로 여는 아침] 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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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로 여는 아침] 숲

입력
2008.09.29 0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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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광

나무들은 굳세게 껴안았는데도 사이가 떴다 뿌리가 바위를 움켜 조이듯 가지들이 허공을 잡고 불꽃을 튕기기 때문이다

허공이 가지들의 氣合보다 더 단단하기 때문이다 껴안는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 무른 것으로 강한 것을 전심전력 파고든다는 뜻이다

그렇지 않다면 나무들의 손아귀가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졌을 리가 없다 껴안는다는 것은 또 이런 것이다 가여운 것이 크고 쓸쓸한 어둠을 정신없이 어루만진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이글거리는 포옹 사이로 한 사나이를 고요히 지나가게 한다는 뜻이다 필경은 한 사나이와 나무와 허공을, 딱따구리와 저녁바람과 솔방울들을 온통 지나가게 한다는 뜻이다

구멍 숭숭 난 숲은 숲字로 섰다 숲의 단단한 골다공증을 보라 껴안는다는 것은 이렇게 전부를 다 통과시켜주고도 고요히, 나타난다는 뜻이다

숲은 전신이 숨구멍이다. 멀리서 보면 빽빽하게 붙어 있는 것 같아도 가까이 가보면 무수한 틈들이 있다. 갯벌에 콩게들이 뚫어 놓은 구멍들처럼 살아 숨 쉬는 이 틈들 속으로 바람과 새가 들고 난다. 좋은 관계란 ‘굳세게’ 서로를 끌어안으면서도 그 사이에 얼마쯤 간격을 둘 줄 아는 태도에서 나온다.

그것이 포옹이다. 나와 너 사이에 여백을 두어 새로운 관계들을 껴안아 보는 것. 그러한 관계와 관계들이 모여 맺힌 데 없이 두루두루 숨이 잘 통하도록 하는 것. 우리 말 ‘숲’ 자는 형상이 사원의 모습을 닮았다.

위로 솟은 지붕(ㅅ)과 단단한 주춧돌(ㅍ)같은 자음, 그리고 절 마당처럼 개운한 모음(ㅜ)의 연결이 그런 느낌을 준다.

이 숲에 성자들이 산다. 세상의 어둠을 위무하기 위해 ‘천 갈래 만 갈래 찢어지는’ 아픔과 ‘골다공증’을 기꺼이 감수하며 선정에 든 나무들. 그 불꽃 튕기는 푸르름이 선승의 ‘할’이다. 이 고요한 기합 소리가 쟁쟁하게 세상을 물들인다.

손택수ㆍ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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