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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론] '합리적 파업'의 전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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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론] '합리적 파업'의 전제

입력
2008.09.29 0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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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사관계론이나 노동경제학을 공부한 사람은 누구나 기억할, 그러나 일반인은 생소할 파업에 관한 이론이 있다.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영국 경제학자 존 R 힉스가 개발한 '힉스의 파업모델'이다. 이 모델은 파업이 일어나 그 기간이 길어지면 노사 양측이 모두 파업비용의 증가를 부담해야 하므로, 이 비용을 감안하면 파업을 하지 않고도 협상이 타결될 수 있는 노사협상의 범위가 존재한다는 이론이다.

노사 정보 공유ㆍ신뢰가 중요

너무나 당연한 소리 같지만, 이 간단한 모델의 시사점은 생각보다 놀랍다. 이에 따르면, 노사가 합리적이고 이성적으로 요구수준을 설정하고 단체협상을 한다면, 파업은 일어날 소지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수많은 파업이 모두 회사와 조합측의 합리적, 이성적 계산ㆍ판단 능력, 협상 능력의 부재에서 나온다는 말인가.

그러나 파업을 두고 회사와 조합측의 합리적 판단능력, 협상능력을 탓하기 전에 왜 우리나라에서 파업이 끊이지 않고, 사회 문제가 되고 있는지를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힉스의 파업모델이 작동하려면 몇 가지 전제가 필요하다. 우선 회사와 조합측이 자신과 상대방의 요구나 파업비용을 합리적으로 계산하기 위해 정확한 정보를 공유해야 한다. 특히 조합 측에서 회사의 지불능력을 판단하기 위한 정보를 얻지 못한다면 합리적, 이성적 요구수준을 설정하기 어렵다. 기업의 비자금 조성이 잇따라 뉴스가 되는 한국에서 기업이 얼마나 투명한 경영을 하고, 그 내용을 노조와 공유하는지는 의문이다.

둘째로, 단체교섭의 주요 유형 가운데 '애티튜디널 스트럭처링(attitudinal structuring)'이 있다. 우리말로 직역하면 '태도적 구성'인데, 노사 쌍방의 신뢰에 기반한 정서적 교섭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단체교섭에서 합리성이 통하려면 서로 상대방을 이성적 존재로서 받아들이는 자세가 필요한데, 한국은 산업화나 노조운동 전개 과정에서 오히려 상대방을 감정적으로 무시하고 혐오하는 현상이 보편화한 게 아닌가 싶다.

또 하나의 요건은 회사나 조합측이 상대방을 무력화하거나 내부의 분파 갈등을 조장하기 위해 파업을 이용해선 안 된다는 점이다. 교섭이나 쟁의의 목표는 어디까지나 합의여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조합을 와해시키기 위해 장기간의 쟁의에 버티다가 문을 닫는 기업이나 매년 임금협상 철이 끝나면 그 책임을 물어 집행부가 바뀌는 조합 소식에 익숙하다.

물론 힉스의 파업모델이 모든 단체교섭과 노동쟁의에 적용될 수는 없다. 정리해고 등 고용구조의 변화를 둘러싼 단체교섭, 개별 사업장 범위를 뛰어넘는 '연대 성격'의 노동쟁의 등에는 이 모델을 적용할 수 없다. 이는 교섭을 통한 합의나 파업의 결과가 한 쪽 내부에 이해 상반을 가져오거나, 문제해결이 개별 사업장에 국한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노사관계에서는 이런 부분들의 비중이 크다.

그런데도 임박하거나 진행 중인 파업은 안타깝다. 노사관계가 합리적이고 성숙한 단계로 발전하는 게 언제나 가능할까. 회사가 노동자나 조합을 무시하는 태도를 버리고 정확한 정보를 제공해 참여를 자극할 수는 없는가. 조합은 내부의 분파적 이해를 떠나 전체 조합원을 위해 회사운영에 보다 책임 있는 자세로 임할 수는 없을까. 그 결과 노사가 신뢰에 기반을 두고, 합리적 교섭을 전개할 수는 없을까.

우리사회를 보면 착잡하기만

힉스의 파업모델이 제대로 적용되는 사회를 보고 싶다. 그런데 상호 신뢰와 합리성이 통하는 노사관계란 상호 신뢰와 합리성이 통하는 사회에서나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이 실망일까, 희망일까. 현대자동차 임금협상이 합의안에 대한 2차 조합원 찬반투표를 거쳐 최종 타결에 이르고, 서울메트로 노조가 파업을 잠정 연기한 것을 지켜보는 마음이 이래저래 착잡하다.

김혜진 세종대 경영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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