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영 지음ㆍ강산 그림/비채 발행ㆍ168쪽ㆍ9,500원
심이 굵고 질퍽한, 때론 유장한 강 같은 이야기를 쏟아내는 소설가 김주영(69)씨가 순하디 순한 책을 냈다. "했습니다"로 끝나는 동화체 말투에 담채(淡彩)의 삽화까지 곁들인 그림소설이다. 출판사측에선 '꿈을 잃은 현대인들에게'라는 위무의 문구를 내세웠지만, 그런 생각 없어도 마른 누룽지 씹을 때의 은은한 단맛을 느낄 수 있다. 섬세하고 부드러운 문체가 통나무 결처럼 이어지며 한 나뭇가지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나'는 백양나무 곁가지다. 기차 기적 소리를 빼면 늘 고요한 농촌 마을을 굽어보며 살다가, 한 남자의 손에 꺾이면서 삶이 송두리째 변한다. 새끼 밴 암소를 토닥이기 위해 농부의 손에 들렸다가 집까지 따라가 사립문 사이에 꽂힌다. 이 집 딸 재희의 종아리를 때리는 회초리로 간택되었다가, 재희를 괴롭히는 놈들을 혼내주는 무기도 되고, 똥덩이를 부수는 똥친 막대도 된다. 그리고 계속되는 모험. 나는 뿌리를 내리고 어른나무가 될 수 있을까.
이 담담한 이야기에는 특정한 시간과 공간이 배경으로 등장하지 않는다. 모두에게 외갓집 동네 같기도 하고 당숙네 마을 같기도 한 '옛날 어느 시골'이 배경으로 둘러져 있다. 이런 흐릿함은 그 속에서 숨쉬는 이야기를 작가의 것이 아닌 읽는 이 각자의 것으로 만든다. 퍽 심심하고 느릿한 모험담이, 질박하고 애틋하고 순수한 것이 남아있던 어린 시절 독자의 모습을 나뭇가지의 눈을 빌려 비춘다. 그래서 모두에게 쉽게 와 닿는다.
순박하면서도 스타일이 살아 있는 일러스트레이터 강산의 그림이 페이지를 넘기는 손을 오래 붙들어 둔다. 가볍되 은근한 여운을 주는, 어른들을 위한 동화다.
유상호 기자 sh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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