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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감독 하명중의 나는 지금도 꿈을 꾼다] <38> 쓰러진 길종이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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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감독 하명중의 나는 지금도 꿈을 꾼다] <38> 쓰러진 길종이형

입력
2008.09.29 0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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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2월22일 목요일. 새벽부터 내리던 가랑비가 시간이 가면서 장대처럼 변했다. 번개와 천둥까지 몰아쳤다. 지구가 무너지는 듯한 소리에 놀라 눈을 떴다. 벽시계가 10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밖은 한밤중처럼 어두웠다. 일어나 거실로 나갔다.

아내가 세 살 난 둘째 아들 준원과 자동차 놀이를 하다가 영화사에서 촬영이 ‘펑크’났다는 연락이 왔다며 더 자라고 하였다. 5시간 밖에 못 잤지만 촬영 펑크 소식에 기분이 가벼워졌다. 6살의 큰아들 상원은 아침 일찍 학교를 가고 없었다.

준원과 아내만이라도 함께 아침식사를 즐길 수 있으니 꿀맛이라 밥을 두 그릇이나 비웠다. 무등 놀이에, 퍼즐게임에, 먹고 뒹굴며 모처럼 아빠 노릇을 하니 그 동안 가족들에게 진 빚을 조금이라도 갚은 듯하여 어깨가 으쓱해졌다.

비는 쉬지 않고 퍼부었다. 준원이가 지쳐 잠이 들었다. 문득 새벽에 형과 통화한 기억이 났다. 나는 아내에게도 서비스할 겸 영화를 보러 나섰다. 참 오랜만의 그녀와의 외출이었다. 특히 내가 출연한 영화를 그녀와 둘이서 일반극장에 가서 보기는 결혼 후 처음이었다.

차가 시내로 진입하는데 천둥번개가 또 쳤다. 어두운 세상이 순간 하얗게 변했다. 아내가 차창 밖을 보다가 어젯밤 꾼 꿈 이야기를 하였다. “캄캄한 하늘에서 갑자기 하얀 별 하나가 떨어졌다가 다시 하늘로 올라갔어. ” 이상한 꿈이라 잠이 오지 않아 꼬박 밤을 새웠다는 것이다.

뭔가 가슴에서 덜컥 내려앉았다. 그녀는 새벽에 형과의 통화 내용을 들었다며 영화를 본 후 ‘형수가 안 계셔서 형이 외로우실텐데...’ 찾아가서 저녁이라도 같이 하자고 하였다. 영화는 형이 이야기 한 대로 아쉬움이 많았다. 그러나 관객들은 비교적 만족해하는 것 같았다. 장내에 불이 켜지자 관객들이 나에게 사인을 받으려 몰려들었다. 장내가 소란해졌다.

이때 장내 방송이 나왔다. ‘극장 직원은 급히 하명중씨를 극장 사무실로 모시고 와 달라’는 것이었다. 이어 극장 직원들이 사람들을 헤치고 달려왔다. 사고를 대비해 극장 측에서 배려해 준 걸로 알고 극장 사무실로 들어섰다.

그러나 사무실에 들어선 나는‘집에 급한 일이 생겼다’는 직원들의 말에 눈이 동그래졌다. 급히 집으로 다이얼을 돌리자 다급한 가정부 목소리가 들려왔다. “큰일 났어요. 막내 형님이 쓰러지셨대요!” 갑자기 세상이 멈춰버리는 듯했다. ‘길종형이...?’ 눈 앞의 모든 것이 사라졌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내가 급히 수화기를 뺏어 들었다.

“언제? 어디야?” 나는 사람들을 헤치고 달렸다. 시가지는 정전으로 암흑이었다. 천둥, 번개는 쉬지 않고 내려치고 있었다. 비도 더 거세게 쏟아 붓고 있었다. ‘명보극장 뒷골목 이화장여관!!’ 좁은 골목길을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정전으로 골목길은 간판 등마저 꺼져 있었다. “이화장여관이 어디요?!” 물어 물어 마침내 여관 현관문을 박차고 달려 들어갔다.

“102호...102호...형, 어딨어?!” 복도 끝 방문이 열리고 한 사람이 급히 뛰어나왔다. “형!!”. 안으로 달려 들어간 나는 그 자리에 바위처럼 얼어붙고 말았다. “피고, 다 그런거 아니갔소...허허허” 하며 미소띤 얼굴로 나를 바라보던 형. 그가 충무로 한 여관 방 구석에 누워 멍한 눈빛으로 천장만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미친듯이 달려가 형을 흔들었다.

“형, 나야!” 형이 천천히 나를 쳐다보았다. “형, 어디가 아퍼?” 형이 오른 손을 겨우 움직여 머리를 가리켰다. “누구야. 어느 놈이야” 나는 형이 누군가와 싸운 줄 알았다. 곁에 있던 한 남자가 말하였다. “그게 아니라 혼자 쓰러졌습니다.” 형이 평소에 좋아하던 영화기자 I씨였다.

“형, 어떻게 된 거야?” 형은 계속 머리를 가리켰다. 뇌졸중 증상 같았다. 우리 가족이 가장 주의할 병이 뇌졸중인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이 정도는 시간만 지체되지 않으면 치료할 자신이 있었다. 급히 119 다이얼을 돌렸다. 그리고 가까운 혜화동 우석대 병원으로 응급 요청을 하였다. 그런데 출발한 구급차는 서울 중심 전역의 정전으로 도로가 완전히 막혀 꼼짝 못하고 있었다.

시간이 빠르게 흐르고 있었다. 형의 고통스런 모습에 나는 숨도 쉴 수 없었다. 다른 방법이 없었다. 나는 형을 등에 업었다. 그리고 되도록 진동이 없도록 거의 숨소리도 들리지 않도록 사뿐사뿐 걷기 시작했다. 그러나 속도는 결코 늦추지 않았다. 아내는 형이 비 맞지 않도록 우산을 받쳐 들고 행인들을 헤치며 앞섰다. I기자가 형을 교대해 업자고 하였다. 그의 마음은 고마웠으나 어느 누구에게도 형을 내주고 싶지 않았다.

캄캄한 서울의 거리. 우리는 폭우를 뚫고 혜화동까지 달렸다. 중학교시절, 술 취한 형을 등에 업고 광화문에서 서대문 집까지 한밤중에 걸어왔던 기억이 새삼 났다. 그 때는 억수로 무거워 몇 번을 쉬며 쉬며 갔었는데 이날은 왠지 형이 업혀 있긴 한가 싶어 얼굴을 돌아보고 또 돌아볼 정도로 가벼웠다. 형은 다행히 아까보다 덜 아파하는 것 같았다.

이튿날, 프랑스 대학 기숙사에 계신 형수에게 알렸다. 중환자실에서 형은 조금씩 회복되는 듯하였다. 형수가 급히 귀국 비행기를 탔다. 형의 상태가 다시 악화하기 시작했다. 중환자실에 있던 나도 제정신이 아니었다. 의사들과 싸움이 벌어졌다. 산소통에 산소가 떨어진 것을 지키고 있던 인턴의사가 깜빡 졸다가 확인 못해 숨이 끊어졌다고 소동이 난 것이다. 나는 미친듯이 날뛰었다. 의사들은 내가 돌았다고 진정제를 놓고 사지를 묶어 처치실에 가두어 버렸다.

그리고 3일 후, 1979년 2월 28일 형은 우리 곁을 떠났다. 이것은 분명, ‘신의 실수’였다. 그토록 아끼던 <신의 아들, 하길종> 을 끝까지 돌보지 못하고 ‘아차’ 줄을 놓았던 것은 분명 신의 실수였다. 아니, 그럴 리 없었다. 나는 신이 다시 그 줄을 잡아 주리라고, 그래서 그를 다시 우리 곁으로 돌려주리라고 굳게 믿었다.

그러나 끝내 신은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지 않았다. 형은 우리 곁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울부짖고 있었다. 당신이, 그토록 아끼던, 당신의 아들을, 주여, 당신은 이리 허망하게 불러가십니까.

그가 떠나던 날 많은 영화인들은 그 곁에 모였다. 나는 그의 떠나는 모습을 기록으로 남기고 싶지 않았다. 그가 떠났다고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짧은 생애를 살았다. 단지 3편의 단편영화와 7편의 극영화를 만들었을 뿐이다. 그러나 그의 아름다운 삶과‘인간과 사회의 구원’을 위한 치열한 영화 정신은 위대했다.

수많은 한국의 젊은 인재들이 충무로로, 충무로로 구름처럼 몰려들어 21세기 한국영화가 세계영화의 중심으로 환골탈태하고 있는 것은 하길종은 떠났으나 ‘하길종의 영화정신’은 도도하게 남아 흐르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가 떠난 지 벌써 29년이 흘렀다. 그러나, 매년 2월28일이면 그의 무덤 앞에는 이름 없는 꽃바구니가 놓여진다. 그것은 영원히 필 한국영화 후예들의 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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