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식 IB시대 저물어도 IB고유업무는 계속된다
세계 금융을 주름잡던 월가 대형 투자은행(IB)의 시대가 허무하게 막을 내렸다. 금융위기의 주범으로 몰린 미국 5대 IB 중 3곳(베어스턴스 메릴린치 리먼브러더스)은 간판을 내렸고 남은 1, 2위 은행(골드만삭스 모건스탠리)은 은행지주회사로 전환했다.
종류만 다를 뿐 충격은 국내 금융계도 마찬가지다. 내년 자본시장통합법 시행 후 IB화를 지향했던 증권사들은 벤치마킹 모델을 상실했고, 한국식 IB를 육성하겠다는 정부 전략도 논란의 도마 위에 올랐다.
박윤식 미 조지워싱턴대 교수는 "미국식 IB를 지향하는 한국판 골드만삭스, 한국판 메릴린치 육성 전략은 이제 재평가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미국식 IB의 시대가 끝났다고 IB 업무까지 지상에서 사라진 것은 아니다. 전문가들은 금융회사의 한 형태로서의 '투자은행(Investment Bank)'과 투자은행업무, 즉 '투자금융(Investment Banking)'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IB(투자은행)는 사라져도 또 다른 IB(투자금융업무)는 남을 수 밖에 없고, 오히려 더 강화돼야 한다는 것이다.
본래 IB는 주식ㆍ채권 등 유가증권을 발행하는 기업과 해당 유가증권을 구매하는 투자자 사이에서 거래를 중개하거나 자문서비스를 제공하고 수수료를 받는 '대리인(agent)' 역할을 해 왔다. 문제는 1990년대 이후 미국의 대형 IB들이 이런 전통적 대리인 업무보다, 직접 투자를 통해 고수익을 노리는 자기자본 투자(PI)에 열중한 데 있다.
증권연구원 신보성 연구위원은 "미국의 일부 IB들은 대리인 대신 자기이익 극대화에 몰입했다"며 "특히 오랜 저금리를 이용, 막대한 자금을 차입해 PI에 올인 했다가 모기지 부실이 드러나자 엄청난 손실을 입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반면, 중소기업을 대상으로 주식ㆍ채권 인수나 M&A자문 등 '대리인' 역할에 충실했던 미국의 중소형 IB들은 이번 금융위기에도 큰 문제 없이 견디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파이퍼 제프리, 토머스 위젤 파트너스, 레이먼드 제임스 파이낸셜, 제프리스 그룹 등 10여개 중소형 IB들은 독자적 영업방식을 고수하면서 앞으로도 번영을 누릴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들은 차입을 통한 PI투자를 거의 하지 않았으며, 모기지 채권이나 구조화 상품도 별로 취급하지 않았다.
금융계에서는 우리 금융회사들도 골드만삭스나 메릴린치 대신 이 같은 중소형 IB에 주목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김형태 증권연구원장은 "미국 IB 중 1~5위만 보지 말고 제프리스 같은 6~8위 중소기업 금융업무에 특화된 IB를 주목하라"면서 "중소기업이 많은 우리 같은 나라는 IB의 필요성이 절실하고, 우리 상황에 맞는 IB를 만드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미국의 대형 IB가 상업은행에 인수되거나 은행지주회사로 바뀌는 추세를 감안, 양자가 결합된 '상업+투자은행(CIB)'을 모델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서병호 금융연구원 연구위원은 "이번 사태로 전문 IB보다 예금ㆍ카드 등 다양한 자금조달 수단을 갖고 있고 리스크를 비교적 잘 관리하는 은행계 IB가 주목 받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 중소기업 M&A 지원센터를 만드는 등 중소기업 대상 IB를 강화해 온 기업은행은 금융위기에도 불구하고 IB에 더욱 박차를 가한다는 방침이다.
지금이 비록 적기는 아니더라도, 모건스탠리 골드만삭스 리먼브러더스의 지분 및 자산을 집중 매입 중인 일본은행처럼, 우리도 해외IB에 대한 M&A를 적극 검토할 필요가 있다.
삼성경제연구소 장재철 연구원은 "산업은행의 리먼 인수 협상이 많은 비판을 받았지만, 세계 주요 IB를 인수해 선진금융기법이나 인재를 수혈하려는 시도 자체는 평가 받을 만하다"면서 "IB 역량을 강화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그들의 우수인력을 얻는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국내 금융회사들이 적극적으로 비슷한 시도를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 절충형 IB가 대안으로
유럽처럼 지주회사 아래 두되 독립성은 보장
#1. 1870년 설립된 독일의 도이체방크가 1995년 대변신을 선언했다. 대출 업무의 수익성이 한계에 다다르자 상업은행(CB)의 틀을 깨고, 투자은행(IB) 부문 강화로 체질 개선을 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그간 조금이나마 IB의 달콤함을 맛본 영향도 컸다. 이후 파생상품의 대가 뱅커스트러스트(99년)와 러시아의 유나이티드파이낸셜그룹(2006) 등 IB를 연달아 집어삼켰다. 2007년 도이체방크의 수익 중 IB 비중은 98년(22%)보다 세배 가까이 늘었다.
#2. 1869년 기업어음(CP)딜러로 출발한 미국의 골드만삭스는 금융시장의 선구자였다. 기업공개(IPO) 선도(1900년대), 인수ㆍ합병(M&A) 기업 집중투자(1940년대), 적대적 M&A 방어전략 개발(70년대), 개도국 민영화 시장 개척(80년대) 등 금융사에 남을 실적을 쌓아왔다.
둘은 모두 IB의 대표주자지만, 서로 다른 길을 걸었다. 도이체방크가 몸집을 불렸다면, 골드만삭스는 두뇌를 개발했다. 흔히 전자를 유럽식(영국 제외) IB, 후자를 미국식(정확히는 독립계) IB 모델로 분류한다.
태생이 극명한 차이를 만들었다. 유럽의 대형은행은 CB업무(예금ㆍ대출)와 더불어 IB업무를 겸영하는 '유니버설뱅킹'(universal banking) 시스템이다.
산업혁명에서 뒤쳐진 독일이 19세기부터 기업의 자금수요에 부응하도록 대규모 은행을 집중 육성하면서 유럽 전역으로 확산됐다. 도이체방크(독일), UBS와 크레디트스위스(스위스), BNP파리바(프랑스) 등은 이후 공격적인 M&A를 통해 유럽형 IB의 강자로 성장한다.
IB의 유럽모델은 내부겸영형으로도 불린다. 은행이 보유한 기업정보의 공유, 은행의 자금력 및 판매망 활용 등 시너지를 낼 수 있다는 게 장점이다.
하지만 내부겸영은 CB와 IB간 이해상충을 낳을 수 있고, IB의 손실이 은행의 지급결제능력에 전가될 가능성도 존재한다. 특히 유럽은 지주회사 형태가 우리와 달라 국내 은행법을 고치지않고선 당장 도입은 불가능하다.
반면, 대공황 이후 은행업과 증권업을 분리한 미국에선 자연스럽게 독립계 IB가 탄생했다. 보스톤은행으로부터 퍼스트보스톤 분리(1934년), JP모건으로부터 모건스탠리 독립(1935년) 등이다.
독립계 IB는 보수적인 CB가 주저하던 길을 거침없이 달려 성공을 일궜다. 창의력과 적극적 도전정신(risk-taking), 신속한 의사결정 및 전문성을 바탕으로 혁신과 신상품 개발에 열을 올려 이익을 극대화했다. 그러나 결국 탐욕으로 변질된 투자행태와 '신자유주의'로 포장된 규제 회피 때문에 자멸하고 말았다.
미국이 유럽모델을 벤치마킹한 '하이브리드'(혹은 CIBㆍ상업+투자은행) 모델도 있다. 99년 미국이 CB의 IB 소유를 허용(GLB법)하면서, CB가 IB를 자회사로 거느린 형태가 출현한 것이다. 씨티그룹 JP모건이 대표적이다.
최근 독립계 IB의 몰락 이후 대세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골드만삭스와 모건스탠리도 이 모델로 변신 중이다. 유럽처럼 IB가 지주회사 우산 아래 있지만 독립된 계열사로 존재한다는 차이가 있어, '자회사형'으로도 불린다.
■ "자통법 더 늦기전에 재검토"
내년 2월 시행되는 자본시장통합법은 글로벌 IB를 만든다는 당찬 취지로 출발했다. 그러나 글로벌 IB들이 잇따라 좌초하면서 자통법도 재검토돼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우선 현 자통법이 지나치게 규제 완화 일색이라는 지적이다. 금융투자상품의 '포괄주의'가 대표적인 예다. 이제까지는 정부가 국내 판매할 수 있는 금융상품 범위를 일일이 지정해 줬지만, 앞으로는 판매할 수 없는 것만 지정하고 나머지는 풀겠다(네거티브 방식)는 취지다.
이렇게 되면 미국 사례에서 보듯, 금융당국이 미처 파악하지 못한 새로운 상품들이 봇물처럼 쏟아질 것이고, 적절한 규제와 감독이 끼어 들 틈이 없어질 가능성이 높다.
자통법이 규정하고 있는 금융회사 겸업규정도 문제가 없지 않다. 골드만삭스처럼 증권사가 기업 M&A 중개업무도 하고, 자기자본투자(PI)도 하면 수익원은 다양해지지만 연쇄적 위험에 노출될 수 있는 것이 최대 단점이다.
AIG의 경우 채권투자 업무에서 부실이 나면서 건실했던 보험업무 등 기업 전체가 무너지는 사태로 확대됐다.
반면, 소비자 보호는 여전히 취약하다. 물론 자통법에도 금융회사는 상품의 내용과 투자에 따르는 위험을 투자자가 이해할 수 있게 설명해야 하며, 설명없이 판매한 상품에서 손해가 발생하면 금융회사는 손해배상 책임을 져야 한다고 명시돼 있다.
그러나 '이해할 수 있게'라는 표현이 너무 애매해 금융회사가 얼마든지 책임을 면할 수 있다는 것이다.
판매자가 투자자 특성에 맞는 투자를 권하도록 한 '적합성 원칙'도 실효성이 부족하다. 예컨대 노후를 대비해 원금손실 가능성이 없는 안전상품을 원하는 투자자에게 위험성이 높은 파생상품을 권할 수 없도록 했지만, 금융회사가 적합성 원칙을 위배해도 손해배상 책임이 없다는 게 문제다. 미국은 적합성 원칙 위반을 사기로 규정하고 그에 따른 손실을 보상토록 하고 있다.
이를 두고 시장에선 "제대로 베끼지도 못했다"는 푸념도 나온다. 자통법은 미국이 아닌 호주 금융서비스개혁법(FSRA)을 근간으로 만들어졌다. 한 업계 관계자는 "자본시장을 키우자는 근본 취지는 살려야겠지만 재검토와 수정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최진주 기자 고찬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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