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부부동반으로 서울에서 친구모임이 있었다. "아! 아직도 멀었어?" 한참을 기다려도 도무지 방에서 나올 생각을 않는 아내를 부르는 내 목소리는 짜증을 눌러 참느라 퉁명스럽기만 했다. "잠깐만 기다려. 금방 끝나." 아내는 이 말을 30분째 하고 있었다. "화장을 하는 거냐, 분장을 하는 거냐? 선 보러 갈 것도 아닌데 무슨 치장을 한 시간씩이나 하고 앉았어? 에이…."
아내는 그제야 방문을 열고 나오면서 내 속도 모른 채 빙그레 웃었다. "자기, 나 어때? 나 괜찮아? 이거 백화점에서 샀는데. 7만원이나 줬어." 이미 속이 폭발직전에 가있던 참에 허벅지가 살짝 보이는 아내의 미니스커트는 더욱 거슬렸다. 아니, 솔직히 미니스커트보다는 '7만원'이란 아내의 말에 눌러 참았던 짜증이 폭발하고 말았다. "당신이 나이가 몇인데 그런 치마를 입어? 다리 좀 봐라. 거울로 다리는 봤냐? 김장철도 아닌데 조선무가 돌아다닌다고 친구들이 욕하겠다!"
거기까지만 했으면 그나마 나았을 텐데 '비싼' 스커트를 턱 하니 사 입은 아내가 얄미워서 하지 말아야 할 말까지 해대고 말았다. "돈이 없어서 애 학원도 다 끊었는데 7만원짜리 치마가 사 입고 싶던? 7만원이면 우리 열흘 생활비다 생활비! 당신은 돈도 많나 봐. 난 차비도 없어서 쩔쩔매고 사는데!" 들쭉날쭉한 월급때문에 사는 게 팍팍해서 아이들 학원까지 끊어버리고 기름값이 아까워 타고 다니던 차도 주차장에 놓아둔 채 버스나 지하철로 이동한지 몇 달짼데…, 옹졸한 나는 보이는 게 없을 정도로 화가 났다.
퍼부어대는 내 말에 아내는 아무런 대꾸도 없이 집을 나섰다. 버스를 타러 가는 길, 열 걸음이나 앞서서 총총거리며 걷는 아내는 뒤 한번 돌아보지도 않았다. 나도 이미 화가 잔뜩 나있던 터라 그런 아내 옆으로 가기 싫어 우린 마치 남남처럼 걸었다. 버스 안에서도 아내는 뒷좌석에 혼자 앉아서 창 밖만 내다봤고, 나도 마치 남인 것처럼 따로 앉았다. 지하철을 타서도 마찬가지였다. 잔뜩 화가 나 남남처럼 따로 따로 외면했다. 친구네 집 앞에 와서야 열 걸음 앞서 걷던 아내의 걸음이 멈췄다. 나는 친구집 벨을 누르며 긴 한숨을 토해냈다.
친구부부가 문을 열고 우리를 반겼다. "왔냐? 주말이라서 차가 많이 밀렸을 텐데, 고생했다. 아, 제수씨 오랜만이에요. 더 예뻐지셨네." 친구가 하는 말에 나는 아내를 쳐다보지도 않고 "예뻐지긴 뭐가 예뻐져요? 그 나이에 꾸며 봤자지"하고 면박을 주어 아내를 창피하게 만들었다. "어머, 왜 그래요. 그래도 인우엄마가 우리들 중에서 제일 예쁜데. 어? 그 스커트, 인우엄마가 입으니깐 예쁘다. 역시 잘 어울릴 줄 알았다니까." 친구 아내의 말에 샐쭉하던 아내가 웃으며 말한다. "매번 너무 고마워요. 애들 옷도 챙겨주고, 이렇게 예쁜 옷까지 보내줘서."
애들 옷이야 작아지는 것들을 정리해서 매번 서로들 보내준다는 걸 알고있었지만 아내의 스커트는 무슨 소리지? 의아해 친구 아내를 쳐다보니 "아, 저 스커트 제가 작년에 샀는데 살이 쪘는지 작아서 몇 번 못 입었어요. 아까워서 인우 옷 보내면서 같이 보냈거든요. 날씬한 인우엄마한테는 잘 어울릴 것 같아서요"라고 하는 게 아닌가? 에휴~ 갑자기 쥐구멍이라도 어디 없나 두리번거려졌다.
몇 달 전 장을 보러 갔을 때 일이 생각났다. 좌판에서 "오천원! 오천원!"하며 파는 옷을 몇 번이고 집었다 놓았다 하는 아내를 보고 "하나 사" 했더니 아내는 "아니야. 나 옷 많아"하며 끝내 돌아 나오던 옷을 슬쩍 놓았다. 겨우 5,000원짜리 옷도 마음 놓고 못 사 입는 아내가 7만원씩이나 하는 옷을 사 입을 턱이 없는데 나는 장난으로 하는 아내 말을 곧이곧대로 듣고 화부터 냈으니…, 너무나 부끄러웠다.
모임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지하철역으로 향하는데 그때까지 화가 풀리지 않은 아내는 여전히 열 걸음 남짓 앞에서 걸었다. '미안하다'고 말하는 게 뭐가 그리 어려웠던지 나도 뒤에서 그냥 남남처럼 걸었다. 지하철역으로 들어가 표를 사는데 '50% 세일' 이라고 써 붙인 옷 가게가 눈에 띄었다.
아까 일이 너무나 미안했던 나는 앞서 걷는 아내에게 뛰어가 팔을 잡고 옷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골라봐. 당신 맘에 드는 걸로 무조건 골라." 겸연쩍게 웃으며 하는 내 말에 아내는 눈을 흘기며 가게 밖으로 나가려 했다. "왜 이래? 나 옷 많다니까. 됐어. 애들 기다리니까 빨랑 집에나 가" "아니야. 내가 미안해서 그래. 그러니깐 당신 맘에 드는 거 골라봐." 그제야 내입에서 미안하다는 말이 나왔다.
가게 주인이 아내를 보고 "아무거나 입어도 예쁘실 것 같은데 하나 골라보세요"하며 하늘거리는 파란 블라우스 하나를 권한다. 아내는 블라우스보다 '삼만 팔천원'이란 가격표를 먼저 보더니 "다음에 올께요"하며 내 팔을 끌고 가게 문을 나섰다.
나는 또 그런 아내를 보며 '무능한 나 때문에…'하는 생각에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어졌다. 돈 못 벌어 애들 학원에도 제대로 못 보내고 아내 옷 하나도 제대로 못 사주고, 그러면서 '7만원'이란 말에 아내 마음에다 빨간 생채기나 죽죽 그어댔으니…. 한심한 가장에 남편인 내가 왜 그리 부끄러운지 자꾸 속상한 한숨만 나왔다.
그런 나를 아내가 보더니 "당신은 나를 그렇게도 몰라?"하고 가만히 속삭이며 내 손을 잡는다.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어 그냥 아내의 손을 힘주어 마주 잡았다. 그렇게 집으로 돌아오는 길, 우리는 나란히 발맞춰 걸으면서 마주 보고 웃었다. 가진 것 하나 없으면서 마음까지 좁아 터져 늘 아내 속만 상하게 하는 나. 그렇지만 이 세상에서 제일 착하고 마음 넓은, 사랑하는 이런 아내가 있기에 나는 또 힘든 세상을 헤쳐갈 용기를 얻는다.
경기 화성시 능동 - 김병기
<저작권자 ⓒ 인터넷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저작권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