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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영 기자의 Who's Now] '등단 50년' 시인 고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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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영 기자의 Who's Now] '등단 50년' 시인 고은

입력
2008.09.26 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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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절모를 눌러쓴 은발의 시인은 방문객에게 인사할 틈도 주지 않았다. 말보다 먼저 내미는 고운 손, 활기찬 악수. 50년째 시를 써온 고은(75) 시인이다.

올해 등단 50주년을 맞은 그를 만나기 위해 그가 초빙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서울대 캠퍼스를 찾았다. 최근 등단 50주년 기념 시집 <허공> 을 내놓은 그는 틈틈이 그려온 그림들을 모아 첫 전시회까지 열며 오래된 화가의 꿈도 이뤘다. 그래서일까, 그의 표정에선 나이를 잊은 듯 활력이 넘쳐났다.

- 등단 50년을 맞으셨습니다. 한국 시사 100년의 절반을 온몸으로 겪어오신 셈인데, 소회가 어떠세요?

"나에게 하나의 가설이 태어났습니다. 나의 50년은 50년 전의 나보다 50년 뒤의 나와 더 혈연적이라는 가설이 그것이죠. 혈연이란 과거로부터 내려오는 것 이상으로 미지로부터 거슬러 오르는 것인지 모릅니다.

한국 현대시 100년은 그것의 막막한 출발과는 달리 이제 자아를 일으켜 세웠습니다. 나는 그게 자랑스러워요. 이 100년이라는 시간 속에는 많은 죽은 시인들의 자취가 역력합니다. 그리고 나 역시 그 자취의 한 분자입니다.

나의 50년은 100년의 절반이기보다 차라리 100년의 동행자입니다. '해에게서 소년에게'는 나의 전야가 아니라 나의 당일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그 우연으로서의 바다가 내가 나아갈 돛배의 필연이기 때문이죠."

- <만인보> 전 26권, <고은 전집> 전 38권 등을 비롯해 누구도 정확히 세지 못하는 엄청난 양의 작품을 남기셨습니다. 그 다산성의 비결이 뭘까요?

"한국 문학은 개척의 사명에 너무 벅찬 나머지 긴 과정들이 생략되는 경우가 허다했습니다. 그래서 김소월과 이상 그리고 윤동주의 요절들이 매혹이었죠. 그러나 이런 매혹은 문학사의 꽃일지언정 문학사의 엄청난 과실들을 도외시할 수 있습니다. 시 몇 편, 시집 한 권 정도의 절창으로 생을 마친 시인들이 적지 않아요.

아니, 1년에 시 한두 편 발표하는 것으로 식민지시대의 모국어가 꿈꾼 결정(結晶)들은 결핍되었습니다. 어떤 질(質)은 질로만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그 질은 반드시 질량(質量)이라는 합성으로서의 양을 담보해야 삽니다. 괴테와 위고의 놀라운 시 양산은 세계 시단의 영광에 값하고 있습니다.

나는 쓸 것이 많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동안 쓴 것에 구애받을 수 없죠. 나는 나 자신도 말릴 수 없게 저만치 가 있는 나를 쫓아가야 합니다. 굳이 비결이라면 그것은 내 신명에 있습니다. 나는 밥도 술도 신명으로 먹어요."

- 50년이나 시를 써오셨는데 질리지도 않으세요? 창작력의 고갈이나 노쇠 같은 것을 느낄 법도 한데요.

"살의 시도 쓰고 뼈의 시도 쓰고 있습니다. 한 벗이 나를 말하기를 언제가 절정인가를 모르겠다고 했는데, 이 말을 나는 겸허하게 받아들여요. 언제가 나의 종말인지 내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내 죽음을 내가 모르는 것처럼 내 시 쓰기가 끝나는 그때가 언제일지 모릅니다. 시는 내 청춘입니다. 내 사춘기입니다."

- 시란 무엇이다, 라는 문장을 참 자주 사용하시는데요, 한국시의 산 증인으로서 시를 어떻게 정의하시나요?

"시의 정의를 시가 거절합니다. 시는 시가 무엇이냐는 정의 이전에 있었습니다. 내 전집 서시에서 '나는 시가 누구인지 모른다'고 노래했어요. 다만 시가 무엇이든 상관없이 나는 시의 길을 걸어왔고 또 시의 길을 걸어갈 겁니다. 시의 정의를 강요받을 때가 있지만, 시는 시이고 또 시이고, 또 시일 뿐입니다."

- 어릴 적 꿈을 최근 이루셨습니다. 직접 그린 그림 35점과 글씨 19점을 선보이는 전시회를 가지셨는데 반응은 어땠습니까? 본인의 작품을 스스로 평가하신다면요?

"내 그림에 대한 자평은 없어요. 전시장을 찾아온 몇몇 화가들이 격려해준 것이 고맙죠. 몇 가지 시 작업을 마치는 대로 유채화를 본격적으로 그릴 겁니다. 아내가 내년쯤이나 화실을 지어준다고 약속했어요. 화면 전체를 여지없이 채우는 그 관능적 충만이 내 그림의 꿈입니다. 한동안 한국의 전통 산수나 문인화를 멀리할 겁니다. 이런 태도는 동과 서의 편향 문제가 아니라 내 자유예요."

- 중학생 때 한하운의 시집을 길에서 주워 읽고 충격을 받아 시인이 되기로 결심했다는 얘기는 아주 유명한데요. 그는 어떤 소년이었기에 50년이나 시인으로 살 수 있었던 걸까요? 고은 시의 기원은 무엇입니까?

"한하운의 시에 앞서 해방 후 최초로 한글로 된 시 '광야'를 중학교 1학년 교과서에서 만난 것이 나와 시의 첫 해후예요. 그때는 시가 무서웠습니다. 그 뒤 저문 날의 길가에서 한하운의 시집을 주워 새벽까지 읽고 또 읽었습니다. 그런 다음 혼자 울면서 결심했죠. 한하운의 운명은 바로 나의 운명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시의 가시성보다 불가시성에 내 시의 기원이 있을 겁니다. 어린 시절의 아침 이슬, 홍수, 저녁 낙조, 밤 기러기 울음소리, 할아버지의 술주정과 아버지의 기쁨들, 저승이나 죽음 같았던 바다, 달, 귀신 등이 내 시의 모태이겠습니다."

- 시인으로서 가장 아름다웠던 시절, 황금기를 언제로 추억하십니까?

"황금기는 아직 몰라요. 나는 늘 신인의 가슴으로 부풀어있습니다. 어제 시 한 편이 나왔어요. '바람이 불면 모든 것이 깃발이 된다'는 시입니다. 행복했습니다."

- 스스로 대표작을 꼽는다면요?

"대표작이란 상투적인 편법입니다. 만약 대표작만이 있는 시인이라면 그 시인은 불행합니다. 그뿐 아니라 나는 나의 시에 대해 타자가 되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내가 나의 시를 함부로 규정할 수 있겠습니까. 몇 해 전에 카리브해 바닷가에서 장엄한 파도를 보았는데 그때 저 파도들이 바로 나의 시리라고 혼자 외쳤어요. 대표작이란 노인에게나 물어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고은 시인의 생애는 파란만장하다. 일제시대 소년기를 보내며 모국어를 몰래 익혔고, 군산중 재학 시절 한국전쟁을 겪었다. 정규교육은 작파하고 입산, 스님이 됐다가 시인이 돼서 환속했고, 결혼도 했다. 그뿐인가, 생의 한뭉텅이는 처절하도록 고스란히 민주화운동에 바쳤다. 그 스스로 광기와 질풍노도의 삶이라고 할 정도로 변화무쌍한 삶이었다.

- 최근 기자간담회에서 "내 광기와 질풍노도는 계속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어요. 그 말이 예사롭지 않게 들렸는데요, 선생님의 이력을 보면 자살 기도, 출가, 환속 등 말 그대로 디오니소스적 삶을 살아오신 것 같은 인상입니다. 시인으로서야 그런 삶이 창작의 큰 자양분이 됐겠지만, 일상인ㆍ생활인으로서는 규범과 부딪히는 일도 많았을 것 같은데요.

"나의 오늘은 나의 어제가 베풀어준 은혜가 아니라 나의 내일이 유혹하는 꿈의 현실입니다. 나에게는 리얼리즘과 로맨티시즘이 하나예요. 질풍노도는 아직도 나에게는 타자의 관념이 아닙니다. 나의 육체예요. 이토록 나는 정신의 미성년입니다. 가능하면 세상의 모든 해답들을 전복하는 문제화의 삶을 살고 싶어요. 나는 노자가 말하는 '반(反)'이 썩 좋습니다."

- 선생님께도 돌이켜보면 부정하고 싶은 시절, 후회되는 시절이 있나요?

"삶이란 회한의 공간입니다. 나에게도 왜 후회나 부정하고 싶은 일이 없겠습니까. 나는 니체에게 결락된 것이 그에게는 후회가 없다는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버지 임종, 어머니의 임종에 내 알리바이가 만들어진 사실이 두고두고 가슴 아파요. 나는 유교 덕목으로서의 효에 대한 회의론자이지만 내 삶의 진원지인 부모에의 헌신이 없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자인합니다."

- 선생님 시 세계에도 큰 영향을 끼쳤는데요, 왜 승려가 되셨었나요? 환속하신 이유는요?

"입산은 시대가 만들었고 하산은 내가 만들었어요. 생사 문제가 너무 일찍 나를 강박했습니다. 전쟁, 이데올로기, 그리고 살아남은 자의 방향 상실, 이런 직접의 환경 속에서 나는 폐허의 미아이고 고아였습니다.

하산은 집단의 진실 뒤에 있는 각자의 진실이 나에게 닿아있는 선택이었습니다. 환속 이후 술은 내 방황의 동력이었고…. 입산의 차원보다 하산의 차원이 약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불교의 낱말로 왕상(往相)보다 환상(還相)에 더 피워낼 꽃들이 있다고 믿습니다."

- 결혼하신 과정 좀 들려주세요. 아내이자 문학적 동반자이기도 한데(그의 아내는 이상화 중앙대 교수다).

"나는 아내와의 만남에 대해서 잘 말하지 않아요. 그것은 성역입니다. 언젠가 아내 자신이 그것을 말할 때가 있을 겁니다."

- 시인으로서 가장 행복할 때는 언제인가요?

"시를 쓰고 난 직후의 행복은 더 이상의 보상이 필요없습니다. 몇 해 전 프랑크푸르트 도서전 주빈국 대표로 개막 연설을 했을 때의 보람은 행복에 닿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인의 진짜 행복은 그런 광장이 아니라 자신의 밀실에서 태어납니다. 시인의 행복은 시의 불행, 시의 행복은 시인의 불행이라는 나의 속담이 나를 경각시킵니다."

- 다시 태어나도 또 시인이 되고 싶으신가요?

"시인이 저 세상의 가녘을 떠돌게 될지라도, 시인이 세상의 조롱거리가 될지라도 나는 그것밖에는 다른 것으로 살지 않겠습니다. 그동안 몇 번인가 정치에의 유혹도 있었어요. 유신 시절이나 그 이후의 몇몇 정권들도 나에게 손짓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내 직업란에는 변함없이 시인만을 쓰고 있습니다. 나는 시의 무기수입니다."

언제부턴가 고은 시인에게는 시련의 계절이 생겼다. 해마다 돌아오는 그 계절, 바로 노벨문학상 시즌이다. 그때마다 노시인은 수상을 점치는 언론의 호들갑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홍역을 치른다. 한편에서는 고은 시인 때문에 한국 문학이 노벨상 병에 걸렸다는 비판의 소리도 들려온다. 그 계절이 또 다가오고 있다.

- 노벨상 질문은 지겨우시겠지만, 묻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사실 일각에서는 선생님께서 노벨상을 위해 전세계를 오가면서 낭독회를 여는 등 고군분투한다고 비판하는 문인들도 있어요.

"(노벨문학상을 탄다면) 내 행위로 수상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문학이 수상의 대상인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나를 해외에 다니는 상사 직원으로 오해하고 있어요. 내가 방문하는 것은 그곳의 초청이나 간청에 응답하는 것인데도요. 지난해에는 일곱 군데 초청을 사절했습니다. 올해도 벌써 네 군데인가, 다섯 군데의 초청을 받아들이지 않았어요.

영국, 프랑스, 인도, 인도네시아, 벨기에 등지에서 여간 섭섭해하지 않고 있습니다. 언젠가 이어령 형이 말하기를 '만약 백남준이 외국이 아니라 한국에서 살았다면 그렇게 세계적인 예술가가 될 수 없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나무에 오르는 사람의 바지를 벗기는 폐단이 한국사회 일각에는 분명 있어요. 낮은 수준의 질시가 그것입니다. 나는 이런 것에 구애받지 않습니다.

요즘은 가능한 집안에서 작업의 시간을 확보하려고 애를 씁니다. 지난 여름에는 '입(入)' 자를 벽에 써 붙이고 일했어요. 내 시가 20개국어로 번역된 것은 기록의 의미가 아니라 각 현장에서의 반응의 의미에 부응한 겁니다.

몇천 부가 나간 것도 있어요. 최근에는 어떤 나라에서 중고등학교의 문학사 시간에 내 <만인보> 가 교재로 사용된 일도 있고, 또 교통성에서 버스정류장의 공간 같은 데 내 시 하나를 부착한 일도 있었습니다."

- 노벨문학상 후보뿐 아니라 캐나다 그리핀시인상, 스웨덴 시카다상을 비롯해 외국의 문학상을 많이 받으셨잖아요. 선생님의 시가 세계적으로 소통되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시는지요. 혹자들은 선생님 시의 불교적이고 동양적인 세계가 서구에 어필한다고 분석하기도 하던데요.

"동양적, 불교적이라는 내 시에 대한 특화된 인상을 넘어서 어떤 합의될 만한 보편성도 한 원인일 겁니다. 여러 평가 중에는 내 시의 세계가 한국인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도 지적되고 있어요.

나는 특수성은 후진이고, 보편성은 선진이라는 바보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서구의 보편성이 반드시 나의 보편성으로 강요되는 그 타자성을 물리칩니다.

'나는 나다'라는 원점에서 내 시적 행위는 시작합니다. 한국 현대시 100년의 시점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것은 이제 한국시가 자아를 일으켜세웠다는 사실입니다. 이제 이식론이나 수용론의 시대가 멀리 지나갔습니다."

- 선생님께 권한이 있다면 누구한테 노벨문학상을 주고 싶으십니까?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몇 나라의 시인들이 나와 형제화돼 있는데, 그들에게도 영광이 돌아가길 바랍니다."

- 2007년 영국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 이명박 대통령, 가수 비와 함께 유일하게 이름이 오른 문인이 되셨습니다.

"지난해 브리태니커에서 등재 문제를 의논해왔을 때 사양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한국이나 한국의 어떤 영역을 대표하지 않습니다. 나는 그 속의 일원일 뿐이죠. 브리태니커 말고도 다른 곳에 나의 사항이 등재된 일 역시 나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 천상 시인이셔서 그렇겠지만, 가끔 선생님에게서 스스로를 신화화한다는 인상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일상에서 사용하시는 언어도 일상언어 같지가 않을 때가 많아요. 이게 어떻게 보면 허위의 포즈처럼도 보이고, 어떻게 보면 어떤 순간에도 시인으로 살고자 하는 시인으로서의 존엄 지키기처럼 보이기도 하는데요.

"사람들이 다들 그래요. 너는 말하는 것이 다 시라고. 우리나라 근대시에서 시인들의 일상언어는 너무 수수합니다. 너무 일상언어예요. '요즘 돈벌이는 어때? 건강은 어때?' 이런 건 정말 경멸의 대상도 아니에요.

요컨대 레토릭이 없어요. 나는 시인은 시어와 일상어의 중간에서 생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소설가의 리얼리즘과 시인의 리얼리즘은 달라요. 내 허영은 역시 시인은 시인의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는 겁니다.

시인의 생리에는 자기 신화성이 있습니다. 보들레르도 제 성명에 귀족의 흔적을 개입시켰고 릴케도 자신을 귀족의 먼 후예라고 했죠. 아니, 고대의 이백은 아예 하늘에서 온 적선이라고 자칭했습니다. 그들에 견주어 나 자신의 신화화는 미미한 것입니다."

- 문학사에 기록될 고은이라는 시인의 챕터가 어떤 내용으로 채워지기를 바라십니까? <만인보> 완간을 비롯해 앞으로의 계획도 궁금합니다.

"나는 문학사 콤플렉스가 아예 없습니다. 그 점에서 나는 문학의 야생(野生)일 뿐이죠. 최근 내 동료가 나를 한국 지성사 속에서 발견하지 않고 한국 야성사의 한 단초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아웃사이더의 역사도 역사죠. 문학사 전통의 어떤 곳에는 타락의 징후가 넘칩니다. 나는 내 문학사입니다. 지금 <만인보> 마지막 한 권 분량의 원고 정리가 끝났습니다.

이 작업 뒤엔 술 한바탕 마신 뒤 다시 다음 일에 손댈 거예요. 앞으로 쓸 것들이 내 뒤에 줄 서 있습니다. 나는 그것들을 하나하나 쓸 겁니다. 시는 자신의 길 위에서 사는 우주의 넋인지 몰라요."

aurevoi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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