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만에 한번 올 사건이다. 위기가 끝날 때까지 더 많은 대형은행이 문을 닫을 수 있다. "(14일 앨런 그린스펀 전 FRB의장)
"한국의 지나친 위기의식이 의아하게 느껴졌다. 오히려 월스트리트의 위기를 기회로 삼을 수도 있지 않은가"(찰스 달라라 미국국제금융연합회 총재)
사상 최악의 경제위기임엔 틀림없다. 대공황도 있었고 오일쇼크도 있었지만 그것은 뉴욕 월스트리트와 런던의 씨티, 한국의 여의도가 실시간 네트워크로 연결되기 이전의 일. '글로벌 금융체제' 출범이 후 처음으로 터진 미국발(發) 금융쇼크는 이 점에서 우리에게도 심각한 충격을 안겨주고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위기감은 떨어진 주가나 치솟은 환율, 혹은 파산상태의 리먼브러더스에 물린 손실 이상이다. 가장 심각한 것은 바로 한국금융산업의 이정표를 잃게 됐다는 점이라는게 금융계 인사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월스트리트는 한국금융의 모델이었다. 내년 시행될 자본시장통합법은 메릴린치 같은 월스트리트 투자은행(IB)를 벤치마킹했다. 정부가 구상했던 '메가뱅크'는 '한국형 골드만삭스'를 그리고 있었다. 월스트리트를 지탱해온 복잡한 파생금융상품, 다양한 사모ㆍ헤지펀드도 곧 도입될 예정이다. 이런 상황에서 닥친 월스트리트의 위기는 "과연 한국금융산업은 이제 어디를 지향해야 하나"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금융당국 고위관계자는 "당초 계획했던 자통법이나 규제완화 작업은 이번 사태에도 불구하고 차질 없이 추진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학계나 시민단체 등에선 "미국도 IB시대의 종말을 얘기하고 금융규제강화를 강조하고 있는데 우리나라가 기존 전략을 그대로 끌고 가는 것은 난센스"라고 반박하고 있다. 한 대형 증권사 고위임원은 "자통법 시행을 코앞에 둔 상황에서 무척 당황스럽다. 그대로 IB를 추진해야 할지 아니면 새롭게 전략을 짜야 할지 답답한 노릇"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바로 이 시점에 월스트리트의 공백을 메우려는 세계 각국, 글로벌 주요 금융기관들의 움직임이 빨라지고 있으며 장차 세계 금융판도가 급속 재편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일본은 노무라, 미쓰비시UFJ 등 대형 금융기관들을 앞세워 도산위기에 처한 미국 IB들을 속속 인수하면서 '금융후진국'의 오명을 단번에 씻겠다는 태세다.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등 유럽계 금융회사들도 미국이 빠져나간 세계금융시장에서 주도권 확보를 위해 발빠른 행보를 나타내고 있다. 우리나라가 금융정책방향에 대해 갑론을박만 계속하고, 금융회사 역시 방향상실감에 빠져 사실상 해외업무를 올스톱 한 사이 세계금융판도는 숨가쁘게 변해가고 있는 상황이다.
전문가들은 어떤 경우에도 금융강국화를 위한 정책적 노력, 금융기관들의 해외진출, 선진시스템의 도입, 새로운 시장개척은 중단되어선 안된다는 점을 지적한다. 삼성경제연구소 장재철 선임연구원은 "우리금융의 후진성이나 낮은 국제적 위상을 감안하면 하루 빨리 세계금융경쟁에 뛰어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중요한 것은 정부당국과 금융기관들이 심리적 혼란상태를 벗어버리고, 체계적인 전략을 짜야 한다는 것이다. 무작정 해외로 뛰어들어선 곤란하지만, 그렇다고 다시 문을 닫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위험천만하고 무모했던 IB와 파생상품기법을 뒤늦게 베껴서는 안되겠지만, 첨단투자 트렌드를 외면해선 안된다는 지적이다. 규제와 감독 역시 '모 아니면 도'식의 접근이 아닌, 옥석을 확실하게 가려야 한다.
그린스펀 말 그대로 "100년에 한번 올까말까한 혼란기임엔 틀림없지만 우리에겐 100년만의 기회일 수도 있으며 남들이 공포에 떨 때가 결과적으로는 가장 좋은 시기"(김남구 한국투자증권부회장)일 수도 있다. 바로 지금이 한국금융이 새 길을 찾아 문을 열어 제쳐야 할 순간이란 얘기다.
문준모 기자 moonj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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