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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연예기자 1호 정홍택의 지금은 말할 수 있다] <26> 영상자료원 회장으로 활동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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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연예기자 1호 정홍택의 지금은 말할 수 있다] <26> 영상자료원 회장으로 활동하며

입력
2008.09.24 0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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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드카를 여러 잔 마시고 기분이 좋아져서 잠자리에 들었다. 얼마나 잤을까? 갑자기 눈이 떠졌다. 밖이 환했다. 대낮이다.'아이쿠 이거 너무 늦었구나.'라는 생각을 하면서 시계를 봤다. 바늘은 2시를 가리키고 있다.

새벽 2시. 서울 시간인가? 아니다. 현지 시간이 틀림없다.'아차! 이것이 말로만 듣던 백야(The Midnight Sun)인가보다.'스톡홀름의 첫날 아침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나는 이 무렵 한국영상자료원(KOFA) 원장이면서 국제영상자료원연맹(FIAF) 부회장 겸 집행위원직을 맡고 있었다. 부회장은 물론이고 집행위원도 회원들이 선거로 뽑는 것인데, 이 국제조직이 생긴 이래로 아시아인으로서는 최초로 당선이 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내 개인의 역량보다도 아마 우리나라의 국제적 위상이 높아진 덕이라고 생각한다.

영상자료원이 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영화필름만 보관하면 임무가 끝나는 것이 아니다. 우선 국내필름은 물론이고 외국에 가 있는 우리나라의 귀중한 필름들을 수집해 와야 한다.

또 외국필름들도 들여와야 하기 때문에 국제교류를 돈독히 해야 한다. 시네마 테크 운동과 영상발전의 기틀을 마련해야 하고 훼손된 필름을 복원하는 기술이 아직 부족한데 이를 외국에서 전수받는 일도 영상자료원의 몫이다. 그 국제적 중심에 있는 조직이 FIAF이다.

1938년에 창설된 FIAF는 문화기구로는 유네스코 다음으로 큰 규모의 세계조직이며 우리나라에서는 2002년에 아시아에서 최초로 FIAF 세계총회를 성공리에 개최 했다. 그 다음 해의 총회가 스웨덴과 핀란드 두 나라 주최로 열리게 되었고, 나는 우리나라 대표로 참석하기 위해 스웨덴에 갔다. 2003년의 일이다.

스웨덴영상자료원이 마련한 사흘간의 회의를 모두 마치고 우리 일행은 핀란드로 이동하게 됐다. 그런데 그 이동 수단이 나를 들뜨게 했다. 운동장만한 배를 타고 헬싱키까지 간다는 것이다.

여행할 때 보따리를 별로 많이 안 가지고 다니는 편이기 때문에 가방이 무겁지도 않았지만 배를 탄다는 기대감 때문인지 내 발 걸음은 한층 더 가벼웠다.

승선권을 보여주었더니 반드시 한 사람씩 들어가야 한다고 했다. 왜 그러는지는 금세 알 수 있었다.'실야라인(Silja Line) 탑승 기념' 사진을 찍기 위해서 였다. 배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나는 일단 놀랐다.

나도 웬만큼 큰 배는 많이 타 봤는데 이렇게 큰 배는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방을 배정 받고 짐을 풀어 놓은 다음에 천천히 배의 내부를 구경하러 다녔다. 맨 꼭대기 데크에 가려면 엘리베이터로 12층까지 올라 가야 한다.

5만톤짜리라면 별로 실감이 나지 않는데, 길이가 203미터이고 너비가 32미터, 그리고 3,000명의 승객이 동시에 타고 승무원이 1,000명 정도가 되며 1년에 500만명의 승객과 30만대의 자동차를 실어 나른다고 하니 그야말로 '대단해요!'다.

그렇지만 큰 배를 타고 여행을 해서 행복했던 것은 아니고 '나를 행복하게 만든 일'은 따로 있었다. 배의 내부를 대충 구경하고 나니 시장기가 느껴져서 식사를 하기 위해 중앙 홀로 갔다.

이곳은 승객들이 누구나 한번은 지나갈 수밖에 없는 곳인데 맨 가운데에 사진과 필름을 파는 코너가 있어서 들여다봤다. 이 배를 처음 승선할 때 찍은 기념사진을 벌써 만들어 걸어 놓고 팔고 있었다. 물론 내 사진도 있어서 한 세트를 샀다.

그런데 문제는, 사진코너에 붙여 놓은 안내문이 나를 열 받게 했다.'이런 저런 사진을 파는데 한 장에 얼마요'라는 안내문이 영어, 스웨덴어, 핀란드어, 그리고 일본어로 돼 있었다. 마침 그때 그 배에는 한국에서 온 관광객들이 상당히 많았고 일본 관광객은 몇 명밖에 없었다.

사진코너에는 나이가 좀 든 아주머니와 젊은 남자가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 항의를 했다. "어째서 한국어 안내문을 걸어 놓지 않는가? 당신들이 보다시피 일본인보다 한국인이 더 많지 않은가?"

그랬더니 나이 든 아주머니가 이렇게 대답했다. "참 좋은 이야기올시다. 당신을 오늘 잘 만난 것 같구려. 첫째, 나는 한국사람과 일본사람을 구별할 재주가 없습니다. 둘째, 그렇잖아도 한국어 안내문을 걸어 놓으려 애를 썼어요. 그러나 아무도 도와주는 사람이 없었는데 오늘 만난 김에 한 두어 장 써놓고 가슈."

나는 즉시 종이를 달라고 해서 한글로 안내문을 큼직하게 써 주었다. 쓰는 김에 다섯 장인가 만들었고, 그들은 고맙다며 내 손을 잡고 몇 번이고 악수를 했다. 그러면서 다른 배에도 이걸 복사해서 주겠노라고 했다. 나는 어깨가 으쓱했다. 기분이 좋았다. 이게 행복이다 싶었다.

실야라인 배에는 지금도 내가 써준 한글 안내문이 있을 것이다. 이런 배 뿐만이 아니라 유럽이나 미주, 또는 동남아시아 등 한국 사람들이 찾아가는 관광지에 한국어로 안내표지를 달아 주는 캠페인을 했으면 좋겠다.

이미 여러 군데 실시하고 있겠지만, 아직 손이 닿지 못한 곳이 혹시 있는지 자상하게 살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나처럼 지나가는 여행객이 써주고 갈수도 있겠지만, 언론사나 민간단체 등이 앞장 서는 것은 어떨는지?

실야라인의 행복을 뒤로하고 헬싱키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곧바로 전쟁을 치러야 했다. 헬싱키에서 열린 FIAF 총회는 한 가지 과제를 가지고 있었다. 2년마다 실시하는 회장단과 집행위원 선거가 그것이었다.

나는 1999년에 스페인 총회에서 집행위원으로 처음 당선 되었고, 2년 뒤인 2001년 모로코 총회에서 재선이 되면서 부회장으로 당선 되는 영광을 안았다.

영국, 독일, 멕시코, 중국, 미국, 러시아 등지에서 온 대표들이 나보고 회장에 출마하라고 권유했으나 나는 이를 마다하고 다시 부회장 겸 집행위원에 출마하여 당선됐다.

그러나 부회장이라는 직위를 안고 귀국한지 두 달 만에 나의 국내 임기가 만료되어 영상자료원을 떠나게 되었다. 그 바람에 여러 가지 꿈을 접게 돼 지금도 아쉬움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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