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부터 매년 가을 서울과 도쿄에서는 양국의 역사학자들이 참가하는 '한ㆍ일 역사가 회의'가 번갈아가며 열리고 있다. 한국사, 일본사, 서양사를 망라하는 양국의 대표적인 역사연구자들이 상호이해를 심화시키자는 취지로 여는 권위있는 학술회의다.
이 회의에서는 2회(2002년ㆍ도쿄) 때부터 일종의 전야제 행사로 "나는 왜 역사가가 됐는가?" 를 주제로 양국의 대표적 역사가들이 진행하는 자전적인 공개강연회가 관례화했다.
본회의도 의미있지만, 이 강연은 양국 역사학자들의 개인적 경험이 어떻게 역사연구로 이어졌는가를 확인할 수 있어 사학계는 물론 일반인의 관심을 끌어왔다.
최근 발간된 <역사가의 탄생> (지식산업사 발행)은 2002~2007년 펼쳐진 이 공개강연을 묶은 책이다. 강연자들의 면면만으로도 양국 역사학계의 계보를 쓸 수 있을 정도로, 노대가들이 강연회를 진행했다. 역사가의>
한국측에서는 작고한 이기백(1924~2004), 고병익(1924~2004)과 김용섭(77) 등 6명의 학자들이 연사로 참여했다. 식민사관과 유물사관의 극복, 서양사 방법론의 한국화, 내재적 발전론의 입론 등 각 분야에서 굵직한 발자취를 남긴 학자들이다.
이타카키 유조(板垣雄三), 나카쓰카 아키라(中塚明), 와다 하루키(和田春木) 등 일본측 발표자 7명도 중동사 연구, 근현대 한일 관계사, 북한 현대사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학자들이다.
이들은 왜 역사가가 되었을까?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으로 이어지는 파시즘 시기에 '군국소년'으로 유년기를 보냈던 많은 일본 사학자들은 전전의 일본적 가치가 전면부정된 '전후 격동기'의 경험이 평화주의를 지향하는 역사학 연구의 길로 이끌었다고 털어놓았다.
독일 사회주의운동사의 대가인 고 니시카와 마사오(西川正雄ㆍ1933~2008) 센슈대 교수는 종전 직후 "전차 안에서 한 중년 여인이 '우리는 도죠한테 속았다'고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 그때까지 사용하던 교과서에서 군국주의적인 문장을 모두 먹물로 칠해 지우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당시의 정신적 혼란기를 회상했다.
나카쓰카 아키라 나라여자대 명예교수는 "전쟁 전부터 천황제에 굴복하는 일 없이 비전향을 고수했던 스승 야마베 겐타로 씨로부터 일본 근대사 연구에 있어서 조선 문제의 중요성을 배웠다"고 털어놓았다.
한국 역사학자들은 좌우대립, 한국전쟁, 군사독재 등 숨 돌릴 틈 없었던 근ㆍ현대사의 체험이 역사가의 길로 인도했다고 자서(自敍)했다.
고 이기백 서강대 명예교수는 " 절망의 수렁 속에서도 오산학교의 전통이 민족에 대한 책임을 저에게 일깨워주었다"고 회고했으며, 이원순 전 국사편찬위원장은 "소학교 4학년 때 일본어와 일본사를 국어, 국사라는 교과서로 공부했던 역사적 슬픔은 충격이었다"고 적었다.
김용섭 연세대 명예교수는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정신이 번쩍 들었고, 전쟁의 원인이 한말 일제하 이래 계급문제, 사회모순의 집약이라고 생각이 들었다"며 농업사 연구에 투신한 계기를 밝혔다.
그들을 역사의 길로 이끈 것은 '시대의 불운'이었으나 역사학계에는 축복이었다. 이 책의 일본어판은 도쿄대출판부에서 출간될 예정이다.
이왕구 기자 fab4@hk.co.kr
아침 지하철 훈남~알고보니[2585+무선인터넷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