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 투자은행(IBㆍInvestment Bank)들이 차례로 문을 닫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면서 국내 금융사들이 '패닉'상태에 빠졌다. 단지 문닫은 IB와 거래에서 입은 손실이나 부실 때문은 아니다. 정부 지도대로, 또 스스로 나아갈 길이라고 굳게 믿어온 모델들이 사라지면서 방향성을 상실해버린 것이다.
▲ 사라진 모델
예금ㆍ대출이 주업무인 전통적 상업은행(CBㆍCommercial Bank)에 비해 공격적 투자로 돈을 버는 IB들은 1980년대 이래 금융시장의 제왕이었고, 또 금융의 미래였다. 그러나 올해 들어서만 미국의 5대 IB 중 베어스턴스, 리먼브러더스, 메릴린치 등 3개가 차례로 사라지게 되면서, IB는 금융의 모델로서 근본적 회의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지난 16일 "우리가 알고 있는 월가(街)는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며 "IB는 몰락하고 CB들이 새로운 금융세계의 중심으로 떠오르고 있다"고 보도했다. 실제로 ▦베어스턴스는 JP모건에 ▦메릴린치는 뱅크오브아메리카(BoA)에 ▦리먼은 일부자산은 바클레이즈에게 넘어가는 등 이번에 문 닫은 IB들은 모두 CB에 매각됐다.
글로벌 IB를 성장모델로 삼아왔던 국내 금융당국과 금융사들로선 이 같은 상황이 당황스러울 수 밖에 없다. 정부가 야심차게 추진해온 자본시장통합법(자통법)은 바로 '한국판 메릴린치'탄생을 고대했던 것인데, 정작 벤치마킹 대상인 메릴린치가 망해 버렸기 때문이다. 내년 자통법 시행을 앞두고, IB로 거듭나기 위해 공격적인 체질개선작업을 벌여 왔던 국내 대형 증권사들도 허탈하기는 마찬가지다.
▲ IB모델 공방
이번 사태를 계기로 IB도입 계획을 전면 재검토해야 한다는 주장이 대두되고 있다. 자기자본의 수십~수백배에 달하는 자금을 별 규제 없이 운용한 끝에 미국에서도 도태 위기를 맞은 IB모델이 과연 국내 금융시장에서 성공할 수 있겠느냐는 주장이다. 기왕에 미국식 신자유주의 모델을 비판해왔던 학자들이 특히 그렇다. 영국 캠브리지대 장하준 교수는 최근 언론인터뷰에서 "문제점이 드러난 모델을 우리가 왜 뒷북을 치면서 뒤쫓아가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정치권 논란도 거세지고 있다. 산업은행의 리먼 인수시도를 따졌던 지난 주 국회 상임위에서 일부 의원들은 IB모델의 타당성문제를 따지기도 했다. 김효석 의원(민주당 민주정책연구원장)은 21일 기자회견에서 IB로 대표되는 미국식 금융모델의 폐기를 주장하기도 했다.
▲ 국내 금융사 어디로
금융사들은 계속 IB모델을 추종해야 할지, 아니면 새로운 미래전략을 짜야할 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분위기다. 한 대형증권사 임원은 "아직은 사태추이를 좀 더 지켜봐야겠지만 상황이 심각한 만큼 어떤 형태로든 IB 사업방향에 대한 일부 수정은 불가피할 듯하다"고 말했다.
증권사들이 리스크 능력을 배양하지 않고 무리하게 글로벌IB를 벤치마킹한 것은 분명 문제다. 하지만 정부가 인위적으로 IB육성 방침을 수립한 것, 특히 지난해부터 서브프라임모기지 부실문제가 터지면서 IB위기론이 대두됐는데도 지금까지도 자통법을 그대로 밀고가는 것은 명백한 잘못이란 지적이다.
하지만 굴지의 IB들이 무너져도, 또 일부 규제가 강화되어도 자기자금투자 인수합병 파생상품거래 등 수익성 높은 IB업무자체가 없어지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때문에 새로운 국제금융트렌드 속에서 '한국형 IB모델'을 찾는 노력을 앞당겨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예컨대 지금까지는 미국식 증권계 IB를 벤치마킹했지만, 앞으론 안전성을 중요시하는 유럽식 은행계 IB가 주목받을 것이란 얘기다. 윤만호 산은 경영전략본부장은 "산업은행은 리먼처럼 예금기반이 없는 증권계 투자은행이 아니라 앞으로 은행기반 기업고객을 바탕으로 하는 도이치방크식 투자은행을 지향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IB업무를 하겠다는 국내 회사 60여개를 합쳐도 메릴린치 하나를 못 따라간다"며 "일단 우리는 규모 면에서 너무 영세하기 때문에 리먼이 아니더라도 다른 형태의 (인수합병)기회는 계속 노려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문준모 기자 moonj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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