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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근준의 이것이 오늘의 미술!] 플럭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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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근준의 이것이 오늘의 미술!] 플럭서스

입력
2008.09.22 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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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 아방가르드 예술의 모순된 표상이 되다

"부르주아 세계의 구역질나고, '지식인 척' 하는, 전문가적이고 상업적인 문화를 정화하라… 문화적, 사회적, 정치적 혁명가들이 통일된 전선과 행동으로 가도록 그 심장부에 불을 당겨라."('플럭서스 선언문'ㆍ1963)

플럭서스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아방가르드 예술활동 가운데 가장 중요한 운동으로 꼽힌다. 하지만 사실 플럭서스는 단일한 이념을 공유하는 작가들의 운동연합체도 아니었고, 실체도 다소 모호했다.

오죽하면 주요 멤버였던 백남준이 이런 농담을 즐겼을까. "역시 유명해지려면 작명이 중요해. 플럭서스, 풀룩수스, 얼마나 좋아. 뭔지는 몰라도 그럴 듯하잖아?"

'흐름'이라는 뜻의 라틴어 '플룩스'를 바탕으로 플럭서스라는 탁월한 단어를 지어낸 작명가는 조지 마추나스(본명 위르기스 마추나스ㆍ1931~1978)였다. 따라서 이 고지식하고 독단적인 리투아니아 태생의 미국인은 '플럭서스의 아버지'라는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정치적 감각을 타고난 마추나스가 플럭서스란 이름 아래 새로운 예술가들을 불러 세우고 첫 공식 활동을 행한 것은 1962년 9월의 일이다.

비스바덴 시립미술관 강당에서 개막한 '플럭서스 국제신음악회'(The International Fluxus Festival of the Newest Music)가 바로 그것. 당시 무대에 오른 멤버는 딕 히긴스, 백남준, 볼프 포스텔, 에밋 윌리엄스, 앨리슨 노울스, 그리고 벤 페터슨이었다.

'미스터 플럭서스'를 자임했던 마추나스는 4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원인은 폐암. 그가 죽자 요셉 보이스와 백남준은 공동으로 '조지 마추나스를 추모하며'를 공연했다.

이들은 74분 동안 듀엣으로 즉흥연주를 했는데, 이후 동료가 죽으면 추모 퍼포먼스로 그 권위를 전유해버리는 일이 플럭서스의 새로운 전통이 됐다.

마추나스의 사후, 플럭서스는 여러 변형을 겪었다. 가장 큰 타격을 입은 것은 익명성과 집단성이라는 플럭서스의 기본 정신이었다.

보이스는 전후 독일을 대표할 영웅적 미술가의 탄생을 갈망하던 독일 문화계의 상황에 영합해 국제적 스타가 됐고, 백남준은 1984년의 위성 TV쇼 '굿모닝 미스터 오웰'로 갑작스레 조국의 영웅이 됐다. 플럭서스의 일원이었던 벤 보티에는 이렇게 회고했다.

"백남준과 보이스는 플럭서스와 무관한 것처럼 보였던 민족주의의 수혜자가 됐다. 백남준의 경우, 가난한 조국에서 갑자기 자신에게 레드 카펫을 깔아줄 것이라 상상이나 했을까."

하지만 고향에서 가장 크게 성공한 플럭서스 예술가는 비타우타스 란즈베르기스와 바츨라프 하벨이다. 란즈베르기스는 리투아니아의 초대 대통령이 됐고, 하벨은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벨벳 혁명'을 이끌어 대통령으로 장기 집권했다. 최근 하벨은 자신의 권력 여정을 희화화한 비극적 코미디인 '떠남(Leaving)'을 발표해 극작가로 화려하게 복귀했다.

미술ㆍ디자인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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