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느 때보다 높고 험했지만, 우여곡절 끝에 9부 능선을 넘은 터. 이번만큼은 HSBC의 국내 은행(외환은행) 인수가 확실해 보였다. 하지만 역시 막판에 발을 뺐다. 자의 반 타의 반, '입질'만 하고 물러선 게 벌써 다섯 번째다. 지난 10년간 되풀이된 HSBC와 한국 정부, 그리고 금융시장과의 악연이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외부 변수(미국발 금융위기) 탓일 수도 있지만, 이제 한국 시장에서 HSBC가 신뢰를 되찾기는 쉽지않아 보인다.
HSBC가 국내 은행 인수ㆍ합병(M&A) 문을 처음 두드린 건 1998년. '김우중 신화'의 몰락과 함께 급매물로 나온 대우그룹 주채권은행인 제일은행 인수전에 뛰어 들었다. 우리 정부의 강력한 구애에도 불구하고 그 해 12월 HSBC가 제시한 인수 조건은 터무니없었고, 결국 제일은행은 사모펀드인 뉴브리지캐피탈에 넘어갔다. 정부 고위 관계자는 "심지어 뉴브리지캐피탈이 제시한 안까지 보여주며 인수조건 변경을 촉구했지만 HSBC는 외면했다"고 했다.
악연은 계속 이어졌다. 이듬 해 지금은 하나은행에 흡수된 서울은행을 인수하기 위해 정부와 양해각서(MOU)까지 체결했지만 "가격이 너무 높다"며 다시 발을 뺐다. 2003년에는 한미은행(현 한국씨티은행), 그리고 2005년엔 제일은행 인수에 나섰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이번에도 우려가 없었던 건 아니다. HSBC가 외환은행 인수 계약을 체결한 지난해 9월은 외환은행 불법 매각 논란이 한창이던 무렵이다. 론스타의 이른바 '먹튀'를 막아야 한다는 여론도 비등했다.
1년간 질질 끌어오던 외환은행 매각 문제가 급진전한 건 불과 얼마 전. "적절한 시기에 HSBC의 외환은행 인수를 승인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전광우 금융위원장의 발언은 '사실상 승인'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우려는 또 현실이 됐다. 우리 정부의 뒤통수를 치듯, 기껏 승인을 해주겠다고 하니 돌연 인수 포기를 선언한 것이다.
사정이야 어찌 됐든, 다섯 번이나 입질만 한 채 발을 뺀 HSBC에 우리 정부와 여론의 시각이 좋을 리 없다. 금융계 한 관계자는 "번번이 정밀실사를 통해 국내 은행의 정보를 속속들이 들여다보고는 일방적으로 계약 파기를 선언하는 것을 보면 정말 얌체 같다"며 "이제 신뢰를 잃은 HSBC가 한국 영업을 대폭 축소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고 말했다.
이영태 기자 yt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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