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법 선선한 아침 저녁기운에 가을이 바짝 문지방에 다가왔음을 느낀다. "생각이 난다~ 홍시가 열리면~ 울 엄마가 생각이 난다~♬"는 나훈아의 노래 '홍시' 가사를 "생각이 난다~ 전어가 날 때면 울 엄마생각이 난다~♬"로 바꾸어 불러본다. 거리가 멀고 내가 맏며느리인 관계로 엄마를 거의 찾아 뵙지 못하면서 그저'지금쯤 내 고향 마산에는 한창 전어 물이 올라 있겠지'생각하며 마른 침만 삼킬 뿐이다. 우리 엄마는 20여년 물고기들을 단칼에 다뤄온 능숙한 '칼잡이'다. 늘 "내가 이리 물괴기들을 마이(많이) 죽이가꼬 저승길이 팬하것나(편하겠나)?"말씀하시며 살아오신 분이다.
내가 초등3학년 때 아버지가 교통사고와 당뇨합병증으로 ○○합섬에서 퇴직하셨다. 그 때부터 엄마가 생계를 책임지셔야 했기에 당시 셋집 주인아주머니가 하는 마산 어시장 횟집에서 일을 시작하셨다. 처음엔 서툴러 손 이곳 저곳이 반창고 투성이었다. 당시엔 학교에 내는 돈이 왜 그리도 많았는지 아침마다 손 벌리는 우리에게 미안함과 속상함으로 짜증도 많이 내셨던 우리 엄마…. 그렇게 어렵게 버는 일당으로 두 언니, 오빠, 나, 동생의 학비며 월세를 감당하셨다. 그 덕에 아쉬우나마 두 언니는 중학교를 졸업했고 오빠도 고등학교까지 다닐 수 있었다.
하지만 엄마 혼자 벌기에는 힘든 살림이었다. 중학교에서 공부를 좀 했던 나는 인문계 고교에 진학해 대학까지 가고 싶었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았다. 담임선생님께서는 공부한 게 아깝다며 엄마 뵙기를 요청하셨다. 하지만 엄마는 딸이 원하는 대로 해줄 수 없는 미안함 때문이었는지 바쁘다는 핑계로 차일피일 미루기만 하셨다. 결국 내가 울고불고 하는 바람에 낮에 잠깐 시간을 내 학교로 오셨다.
다른 엄마들처럼 예쁘게 차려 입지도 않고 회를 뜨다 그냥 오신 듯 물 젖은 몸뻬바지 차림의 엄마 몸에서는 생선비린내까지 났다. 창피했지만 그래도 날 위해 짬을 내주신 엄마가 고마웠다. 하지만 쥐어짜서 될 형편이 아니었다. 결국 나는 여상에 원서를 썼고 시험성적이 좋아 장학금으로 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용을 써도 형편이 나아지기는커녕 현상유지하기도 빠듯했다. 그렇게 칼을 놓지 못한 엄마의 회 뜨는 솜씨는 눈부시게 발전돼 갔다. 나는 누구보다도 더위를 많이 타지만 여름보다는 겨울이 더 싫다. 장갑 끼고는 회를 뜰 수 없기 때문에 추운 겨울이면 늘 빨갛게 갈라지는 엄마의 얼음장 같은 손을 잡아본 아픈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요즘처럼 선선한 가운이 느껴질 때면 엄마는 늘 늦은 밤 횟집 어항에서 전어 몇 마리를 잡아 오셔서는 "핸아야(현아야), 이거 묵어봐라. 가을엔 전어가 억수로 맛있다 아이가"하시며 회를 만들어 내오셨다. 엄마가 직접 만두신 횟장과 막장을 찍어 상추, 깻잎에 싼 전어회는 꿀맛이었고, 그 맛에 엄마에게서 나는 생선비린내의 거부감도 사르르 녹아 버렸다. 엄마는 "전어는 뼈 째 씹어 묵어야 지대로다. 뼈 뿔라진(부러진) 사람도 이거 무몬(먹으면) 금방 붙어 삔다"하시며 뻥을 치기도 하셨다. 때론 양념을 발라 맛있게 구워 주시기도 했는데 그 맛은 정말 '가을전어 굽는 냄새에 집 나간 며느리가 돌아온다'는 말이 실감날 정도였다.
잔 가시들이 가끔은 내 목구멍에 걸려 곤혹스럽기도 했지만 지금 생각하니 내 통뼈의 비결이 뼈째 먹은 전어 덕인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 전어에 입맛을 들인 나는 가을이 되면 엄마가 오시기전에 곯아 떨어지던 수면습관까지 바꿔가며 엄마가 오시기전에는 절대 잠들지 않으려 애를 썼다. 혹 엄마의 두 손에 까만 봉지가 들려 있지 않으면 괜히 짜증을 부리며 이불을 뒤집어 쓰기도 했다. 별보고 나가 별보고 들어오시는 엄마를 안아드리지는 못할망정…, 남의 가게에서 눈치 보며 가져오시거나, 아니면 엄마의 일당에서 값을 제하고 가져오셨을 텐데…. 그땐 참 철이 없긴 없었던 것 같다.
88년 무사히 고교를 졸업한 나는 은행에 들어갔다. 사회생활을 하게 되니 회식도 잦아 맛있는 것을 많이 먹을 수 있었다. 회식장소를 횟집으로 잡을 때면 비록 엄마 소유 가게는 아니지만 엄마표 초장과 막장의 기똥찬 맛을 동료들에게 자랑하고 싶어 내가 엄마 일터로 장소를 정했다. 동료들이 엄마의 양념장 맛과 매운탕 맛에 혀를 내둘러 감탄하면 나는 학창시절 엄마 몸의 비린내를 부끄러워하던 딸이 아니라 어깨를 으쓱거리며 엄마를 자랑스러워하는 딸이 됐다.
나는 돈을 벌어 남의 가게가 아닌 우리 엄마의 가게에서 그런 맛을 맘껏 뽐내시게 하고 싶었지만…, 짚신(?) 한짝을 찾아 낼름 주워 신고 여기 강원도까지 와 버렸다. 엄마는 이후 IMF로 자영업자들이 줄줄이 쓰러지던 해 일하시던 횟집도 문을 닫게 돼 잠시 칼자루를 내려놓으셨다. 그렇지만 엄마는 "10년 이상 썰어온 회를 못 써니 도리어 몸이 아파 안되겠다"며 다시 일자리를 알아보시고는 곧 칼자루를 다시 집어 드셨다. 그렇게 10여년을 더 칼잡이를 하셨다. 지금은 칠순을 훌쩍 넘기신 왕년의 칼잡이 울 엄마, 추운 겨울 찬물에 손 담그며 회를 뜨시지 않아 좋지만 그래도 아쉽다.
얼마 안 있으면 아버지 제사이다. 아버지는 막내딸 전어 좋아하는 줄 아셨는지 가을전어가 한창일 때 돌아가셨다. 그래서 이맘때 제사 지내러 친정가면 늘 얼음 채운 아이스박스에 전어회 가득 썰어담고 와 시댁에 우쭐대며 자랑할 수 있었다. (아, 지금도 입안의 침들이 흘러내리기 일보직전이당~~ㅋㅋ) 이 자리를 빌어 엄마의 칼에 운명을 달리한 수천, 아니 수만 마리 물고기들의 명복을 빈다. 우리 엄마는 지금도 그러신다. "내가 천국에 갈 수 있겄나? 우짜끼고, 다 묵고 살자고 한긴데"하시며 먼 앞날을 걱정하신다.
엄마,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세요. 사랑합니데이~.
강원도 삼척시 성내동 - 정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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