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오스터 지음ㆍ이종인 옮김/열린책들 발행ㆍ256쪽ㆍ9,800원
상담전문가들에 따르지 않더라도 이야기는 탁월한 치유의 수단이다. 아픔이 이야기로 표현되기까지 아픔은 그대로 남아있고 아픈 사람은 아픔의 목적어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야기라는 행위는, 아픈 사람이 주어가 되어 그 아픔을 대상화하면서 견인할 만한 것으로 바꾸어가는 과정이다.
현대 미국문학의 대표적 작가 폴 오스터(61)는 올해 내놓은 14번째 장편소설 <어둠 속의 남자> 에서 상처를 치유하는 기능으로서의 이야기의 효과를 의식하고 있다. 주인공들은 질병을 앓거나 부상을 당한다는 오스터 소설의 문법에서 벗어나 있지 않다. 안팎 이야기의 현실이 서로를 투영하고 교호하는 일종의 메타소설인 이 소설에서 바깥 이야기의 주인공은 은퇴한 일흔둘의 도서비평가 오거스트 브릴. 한 해 전 암으로 아내를 떠나보낸 뒤 스물세 살의 손녀 카티아와 함께 마흔일곱 된 딸 미리엄의 집에 얹혀살고 있다. 사위는 5년 전 딸을 버리고 떠났으며 손녀의 남자친구도 전장에서 죽었다. 그 역시 자동차 사고로 다리를 쓸 수 없다. 어둠>
완벽한(!) 육체적ㆍ정신적 상처를 안은 채 불면증에 시달리는 브릴은 긴 밤을 견디기 위해 어두운 방에 혼자 앉아 자신을 상대로 지어낸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가 들려주는 속 이야기의 주인공 오언 브릭은 뉴욕에 거주하는 스물아홉살 마술사. 잠에서 깨어보니 자신이 무자비한 내전 상황에 던져져 있음을 깨닫는다. 2000년 대통령 선거결과에 불복, 뉴욕주를 비롯 15개주가 연방에서 탈퇴하면서 미국에서는 제2의 남북전쟁이 발발해 있다. 브릭에게 맡겨진 임무는 내전을 종식시키기 위해 한 인물을 죽여야 하는 암살자 역할이다. 그리고 그가 죽여야 하는 인물은 이야기의 창조자 인물 브릴이다.
폴 오스터라는 능란한 이야기꾼은 속이야기의 주인공 브릭에게 '자신의 창조자를 죽여야 살 수 있다'는 역설적 현실을 맞딱드리게 하면서, 안팎 이야기에 살을 붙여간다. 브릭과 브릴의 이야기를 동심원으로 영화평론에 관심이 많은 브릴의 손녀가 들려주는 영화 이야기, 브릭과 브릴의 가족과 연인들이 들려주는 이야기 등 다양한 이야기들이 짜임새 있게 맞물린다. 브릭이 결혼, 외도, 이혼, 재결합, 배우자와의 사별 등으로 이어진 고단한 인생 역정을 손녀 카티아에게 모두 털어놓으면서 날이 밝는다는 마지막 장면은 '치유로서의 이야기'의 효용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인간들이 서로에게 해대는 지저분한 행위들이 그저 변태가 아님을 그녀가 깨닫기를 바란다. 그런 행위들은 인간 존재의 필수적 한 부분인 것이다." "오로지 선량한 사람만이 자신의 선량함을 의심하고,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선량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나쁜 자는 자신이 선량하다고 생각하지만, 선량한 자는 자신의 선량함을 의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인생과 인간에 대한 작가의 날카로운 통찰도 작품의 완결성을 높인다. 손녀 카티아의 남자친구가 이라크의 테러리스트들에게 참살당하는 설정 등 작품은 공공연히 반 부시, 반전 의식을 드러내고 있다. 개인의 내면 문제에 대한 천착에서 정치적인 문제로 관심을 돌린 오스터의 변화를 관찰하는 일도 흥미롭다.원제 'Man in the dark'.
이왕구 기자 fab4@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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