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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숫자의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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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숫자의 문화

입력
2008.09.19 0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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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보는 가장 간편한 방법은 숫자를 통해 보는 것이다. 인생도 그렇다. 내가 사는 아파트는 몇 평인데 누구는 몇 평에 살더라, 앞으로 살아가야 할 날이 몇 년인데 통장에는 얼마밖에 안 들어 있구나, 하는 것으로 한국을 사는 인생은 간단하게 규정된다.

요 며칠 사이는 미국의 투자은행들이 무너지자 코스피가 몇십 포인트 추락하고 환율은 몇십 원 뛰었다는 뉴스로 세상이 자고 나면 뒤집힌다. 첨단 자본주의의 상징으로 떠받들어지던 투자은행들은, 무너지고서야 파생상품 어쩌고 하는 숫자의 장난과 거품 위에 서 있었다는 비난의 화살을 받고 있다.

숫자와는 거리가 있는 듯한 문화 쪽도 그렇다. 사실은 숫자 놀음이다. 1980년대 말부터 현대미술에 바람을 몰고 온 영 브리티시 아티스트(yBa)의 선두 주자로 꼽히는 올해 43세의 데미언 허스트. 그는 15, 16일 이틀 동안 자신의 작품 223점을 한꺼번에 소더비 경매에 내놔 거의 매진을 기록하며 1억1,000만파운드(약 2,200억원)어치를 팔아치웠다. 월가가 초토화되고 세계 경제가 추락하는 바로 그 날 일어난, 15년 전 피카소 작품 경매가 세웠던 기록(약 1,300억원)을 무색하게 만든 미술판의 사건이다.

허스트의 작품은 아이디어가 넘치고 대담하며 아름답기도 하다. 하지만 그는 미술품 투자회사와 손잡고 자기 작품을 사들인 뒤 되팔아 엄청난 차익을 챙긴 전력도 있고, 이번에도 화랑을 통해 작품을 내놓는 통상적 절차가 아닌 경매를 통해 신작을 팔아치움으로써 장차 미술계 질서에 혼란을 초래할 것이라는 비난을 사고 있다. 누구보다 숫자 놀음에 능한 허스트가 기업형 작가로 불리는 이유다.

한국에서는 45억 2,000만원에 경매가 낙찰됐던 박수근의 그림 '빨래터'가 진위 논란에 휩싸여 재판을 앞두고 있다. 박수근과 함께 이중섭 작품의 수많은 위작이 들통났던 것도 그리 오래지 않은 일이다. 우리 미술계의 끊이지 않는 위작 논란도 문화의 숫자 놀음과 무관하지 않다.

한국 영화는 어떤가. 2001년 전국 관객 증가율 44.9%를 기록하는 등 번창일로를 달리는 듯하던 한국 영화산업은 이후 침체에 빠져 지난해 서울의 경우 관객 증가율이 –2.4%였다. 웬만한 블록버스터 급이라면 거뜬하게 1,000만 관객 기록을 경신하던 것이, 요즘은 수백억원의 제작비와 마케팅비를 투입한 작품도 천만 관객은커녕 본전도 못 건지고 있다는 소식이다.

그 원인을 영화판의 숫자놀음, 그로 인한 거품에서 찾는 이들이 많다. 된다 싶으니 너도 나도 한 탕 해 보자고 덤벼들었다가 심지어 개봉관도 못 구하는 영화들을 양산해온 구조다. 2001년 65편이던 제작 편수가 2006년 110편, 2007년 124편으로까지 늘어난 외형만큼 그 수렁도 깊어지고 있다.

숫자의 문화는 거품의 문화, 사상누각의 문화다. '백년 만에 한번 있을 금융위기'라는 세계 자본주의의 위기 앞에서, 그 허망한 숫자놀음을 따라 해 온 자본주의 문화산업이라고 버틸 방도는 없을 것이다. 문화야말로 거품의 환상에서 벗어나 그 고유의 속성대로 내실을 더 튼튼히 할 수밖에 없다. 또 하나의 숫자가 생각난다.

지난해 한국의 자살로 인한 사망자가 무려 1만2,174명이라는 것, 그리고 20~30대의 사망원인 1위가 자살이라는 것. 그들은 우리 사회가 문화적 결속력으로 묶어주고 더불어 살아나가야 할 사람들이다. 자살대국으로 불리는 일본의 작가 무라카미 류가 연전에 낸 <자살보다 섹스> 라는 책이 있다. 그가 여기서 자살의 대안으로 제시한 섹스는 기실 문화의 다른 말이다. 이성간의 섹스처럼, 숫자놀음이 아니라 문화적 온기에 의해 한 사회는 튼튼하게 지속될 수 있는 것이다.

하종오 문화부장 joh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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