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 대본을 쓰며 이토록 힘겨운 시간이 또 있었던가. 극작가 배삼식(38)씨는 연극 '은세계'를 준비하던 여름 내내 마음 속으로 분노를 삭여야 했다.
1908년 11월 15일 원각사에서 처음 막을 올린 한국 최초의 신연극 '은세계'가 원각사 복원을 취지로 건립된 정동극장에서 10월 3일부터 19일까지, 100년 만에 다시 무대에 오른다.
극단 미추와 정동극장의 공동 주최로 열리는 역사적인 한국연극 100주년 기념 공연을 앞둔 배씨의 소감은 이렇게 시작했다. "동의할 수 없는 생을 살다 간 부모를 혐오하지만 또한 그들과 닮아 있는 자식의 심정"이라고.
신소설이자 표지에 신연극이라 기록된 이인직의 <은세계> 는 신연극의 효시로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작가 이인직의 친일 행적은 배씨에게 너무 무거운 숙제였다. 은세계>
더욱이 소설의 전반부는 이인직의 창작이 아닌, 강원도에서 불리던 판소리 '최병두 타령'을 각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결국 배씨가 고통 끝에 얻은 깨달음은 '예술을 지키고 시대의 목소리를 담고자 했던 당대 배우들의 노력을 담자'는 것이었다.
"저도 작가지만 그간 우리는 흔적이 남는다는 이유로 글을 썼을 뿐인 작가 이인직에게만 모든 영예와 책임을 떠안겨 온 것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연극은 배우의 예술인데 말이죠."
이렇게 해서 2008년의 '은세계'는 이인직의 원작 소설을 그대로 무대로 옮기는 형태도, 1908년 공연된 창작 창극을 재연하는 것도 아닌 새로운 모습으로 재탄생됐다. 내용은 '은세계'를 쓴 이인직의 삶과, 원각사에서 공연을 준비하는 광대들의 이야기가 두 축을 이룬다.
1908년의 창극 '은세계'는 극중극으로 삽입돼 당시 무대에 섰던 김창환 강용환 송만갑 이동백 허금파 등 예술가들의 눈물과 희망을 표현하는 도구로 활용된다.
배씨는 "100이라는 숫자에 큰 의미를 두지는 않는다"고 했다. 힘겹게 예술의 맥을 이어가는 것은 100년 전의 예술가든 지금의 연극인이든 마찬가지라고 믿기 때문이다.
"뿌리를 들여다보는 것은 지금 우리가 어떻게 가고 있는가를 되새기는 행위니까요. 단지 100년 전의 공연을 복원하는 게 아니라 공연을 만드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처한 연극계의 현실을 돌아보고 싶었습니다."
100년 전 광대들의 모습에서 이 시대 연극인들의 고민을 목격했듯 그는 그토록 미워했던 작가 이인직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
"세력 없는 서출이었던 이인직에게 친일이 과거로부터 분리되고 싶은 몸부림이었던 것처럼 나 역시 연극인으로서 이인직을 부끄러워하며 과거를 부정해 온 셈"이라는 게 그의 말이다. 공연을 목전에 둔 지금 그에게 '은세계'와 이인직은 더 이상 분노가 아닌 연민이다.
지난해 '열하일기만보'로 대산문학상과 동아연극상을 모두 거머쥐며 실력파로 인정받은 배씨는 ''그저 최선을 다한 광대들의 노력인 '은세계'가 최초의 연극으로 남았듯, 길고 긴 시간 위의 한 부분으로 서 있는 내 모든 작업의 발자취도 하나하나 큰 의미가 있다는 생각을 새삼 자주 한다"고 했다.
"제가 그랬듯 이번 '은세계' 공연을 통해 연극인들이 뿌리에 대해 갖고 있는 열패감을 떨쳐버리고 그 뿌리를 자랑스럽고 따뜻하게 기억했으면 해요. 관객들도 예나 지금이나 연극예술인들이 여러 한계를 극복하며 삶의 모습을 담아내려 애쓰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손진책 연출. 정태화 김종엽 김성녀 김성예 등 출연. 공연 문의 (02)751-1500
김소연 기자 jollylif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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