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코블리네시안(Coblinasian)입니다." 미국의 골프 황제 타이거 우즈가 '오프라 윈프리 쇼'에 초대된 자리에서 "당신은 누구냐?"는 질문에 대해 들려준 현답(賢答)이다. 다문화 사회를 살아가는 현대인의 다중적 정체성을 매우 재치 있게 표현하고 있는 셈이다.
타이거 우즈 스스로의 해명에 따르면, 자신의 몸 속엔 백인(Caucasian) 피와 흑인(Black) 피가 흐르고 있는가 하면 토착 인디언(Native Indian)의 피도 흐르고 있고 아시아(Asia)의 피 또한 섞여 있다는 뜻이었다 한다. 미국에서 인종적 배경을 묻는 센서스 조사 항목에 '기타(others)'란을 두어 자유롭게 표기하도록 하고 있는 현실과 맥을 같이 하는 이야기다.
▲ 정체성 인정이 중시되는 사회
이름하여 '정체성의 정치(Identity Politics)'가 미국 정치 무대 전면의 화두로 부상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정체성의 정치가 사회적 이슈로 등장하여 세간의 주목을 끌게 된 계기로는 미식축구 선수 O. J. 심슨 아내의 죽음을 들 수 있다. 당시 심슨의 재판 과정 및 결과를 두고 미국 여성들 사이엔 미묘한 전선(戰線)이 형성되었다.
곧 백인 여성들은 그 사건을 전형적인 가족 폭력으로 이슈화하여 아름다운 백인 아내를 죽음에 이르게 한 심슨을 가부장제의 화신이라 비난했던 반면, 흑인 여성들은 동일 사건을 인종차별의 관점에서 보아 결정적 증거가 없음에도 범인으로 낙인 찍히고 있는 심슨을 피해자로 규정하며 동정적 시선을 보냈다. 여성 집단 내부에 정체성의 우선순위를 성별에 두느냐, 인종에 두느냐에 따라 동일 사건을 보는 시각에 미묘한 분열이 일었던 것이다.
이제 정체성의 정치는 성과 인종을 뛰어 넘어 더욱 복잡한 양상을 띠며 전개되기 시작했다. 실제로 대통령 선거를 앞둔 미국의 유권자들은 인종에 따라 표를 찍어야 할지 성별에 따라 후보를 선택해야 할지, 세대에 따라 표를 던질지 후보자의 성향을 중시해야 할지 혼란스러운 선택에 직면하고 있음이 다양한 통로를 통해 확인되고 있다.
알래스카 주지사 출신 페일린은 '하키 맘'으로서 여성과 젊은 세대에 어필하지만 동시에 낙태 반대론자라는 점에선 보수적 가치를 대변한다. 그런가 하면 상원의원 출신 오바마는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 후보라는 참신성을 지니고 있지만 그 자신은 전형적인 중ㆍ상류층 가족생활을 누리고 있다.
자신을 규정하는 다중의 정체성 가운데 우선순위를 어디에 둘 것인가를 둘러싼 미국의 고민은 더 이상 미국적 현상만은 아님이 분명하다. 시시각각 다문화성이 심화되고 있는 한국사회의 맥락에서도 앞으로 이 문제는 매우 민감한 쟁점을 불러일으킬 가능성이 매우 높다 하겠다. 우리네도 국적이 다른 사람들이 한 직장에 근무하고, 인종이 다른 사람들이 한 가족을 이루며, 가족 안에서도 성별과 세대에 따라 권력 및 희소 자원의 불평등한 분배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고려할 때 그러하다는 말이다.
▲ 우리사회 내공 너무 약해 걱정
일례로 부동산 정책은 사회경제적 계급에 따라 이해관계가 상충될 것이요, 교육관련 정책은 이데올로기와 계급적 요소가 밀접히 연관되어 집단 간에 매우 복잡한 갈등양상을 띨 것이며, 양육 및 부양 관련 정책은 성별과 세대에 따라 첨예한 대립을 보이게 될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다양한 사회정책에 대한 폭 넓은 합의를 이끌어내고 획일적 강제가 아닌 사회적 통합을 이루어내기 위해서는, 사회적 차원의 다원화 및 이질화에 대한 적극적 포용 및 인정(recognition)이 무엇보다 시급히 요구된다. 미숙한 대처로 인해 과도한 사회 갈등을 불러일으키는가 하면, 불필요한 종교 갈등까지 유발하고 있는 답답한 현실을 대하자니, 향후 더욱 복잡하게 전개될 정체성의 정치에 대응할 우리사회의 내공 수준이 의심스러워 오고 지레 불안감이 증폭되어만 가는 건 나만의 기우는 아닐 듯싶다.
함인희 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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