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일 오후 9시 서울 중랑구 망우동 혜원여고. 학교 내 한 건물이 환하게 불을 밝혔다. 뒤를 이어 한 무리의 학생들이 들어오더니 짐을 풀고 방 단장을 하느라 실내가 금세 분주해졌다.
이날 기숙사가 처음 문을 열어 학생들이 입실을 시작한 것이다. 연면적 1,300㎡에 지상 4층 규모인 기숙사는 120명(1실 4인)을 수용할 수 있고, 세미나실 회의실 컴퓨터실 등 다양한 학습 편의 시설도 고루 갖췄다.
5월21일 첫 삽을 뜬 지 3개월여만의 결실이다. 3학년 김서인(17) 양은 "학교에서 밤 늦게까지 공부하다가도 귀가 걱정 없이 기숙사로 돌아와서 공부할 수 있어 참 좋다"며 "학교의 배려를 피부로 느낀다"고 말했다.
■ 고교, 생존의 기로에 서다
고교 기숙사 설립은 대단한 일은 아니다. 일부 지방 명문고나 과학고, 체육고를 중심으로 이 정도 시설을 보유한 학교는 적지 않다. 혜원여고 기숙사가 주목을 받는 이유는 서울 지역 일반계고 가운데 처음 건립된 기숙사이기 때문이다. 2010년 고교 선택제 시행을 앞둔 일선 학교의 '세일즈 전쟁'의 한 단면으로 이해되는 부분이다.
서울시교육청은 현재 중학교 2학년생들이 고교에 진학하는 2010학년도부터 신입생 배정 방식을 확 뜯어고친다. 지금까지는 2, 3개 구를 하나로 묶어 거주지와 가까운 거리에 있는 학교에 학생을 강제 배정하는 식이었다.
그러나 달라진 체계에서는 선택지의 폭이 서울에 속한 모든 고교로 확대된다. 표면적으로 보면 개인의 희망과 적성을 고려해 학교를 골라 지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고교들은 극도로 긴장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학생을 기다리기만 했다가는 모집 정원도 채우지 못해 '기피 학교'로 낙인 찍힐 지 모른다는 위기의식이 확산되면서 나름의 '자구책'을 속속 내놓고 있다.
민해 혜원여고 교감은 "기숙사 외에도 400석의 독서실형 자습실을 완비하고, 독서ㆍ논술 교육을 강화하는 등 차별화 전략에 힘을 쏟고 있다"고 전했다. 그는 "장기적으로 중랑ㆍ동대문구 지역에서 제 1의 선호학교가 되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일선 고교의 학생 유치 경쟁은 벌써부터 불을 뿜고 있다. 대학들의 홍보전을 방불케 할 정도다. 별도의 대응팀을 꾸려 직접 설명회에 나서거나(영훈고), 지역 중학생들을 대상으로 무료 논술강좌를 열기도 한다(진선여고). 보성여고와 홍익대부속고 등은 학교가 높은 곳에 위치해 학생들의 통학에 불편하다는 이유로 학교 이전을 검토하고 있다.
■ 강북 학생의 강남진입 확률은 10%선
고교선택제 도입이 확정되면서 학부모와 학생들의 최대 관심사는 원하는 학교에 들어갈 확률이다. 고교선택제는 강북 학생도 강남 학교 진학을 허용하고 있다.
액면 그대로 보면 교육여건이 우수하고 명문대 진학률이 높은 강남학군으로의 쏠림이 예상되는 대목이지만, 결과는 반드시 그럴 것 같지 않다. 선택권 확대가 여전히 추첨 배정제도를 근간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교육청이 고교선택제 시행을 전제로 모의 배정을 실시한 결과, 1단계 단일학군 개방비율을 30%로 정했을 경우, 타 학군 지원자가 강남학군에 배정될 확률은 남자 10.9%, 여자 11.2%였다.
10명 중 1명 꼴로 다른 지역 학생이 강남 학교로 간다는 얘기다. 매년 2,000여명 정도 정원이 남아도는 강남 지역 사정을 감안하면 크게 우려할 만한 수준은 아니다.
문제는 배정 결과가 아니라 지원 단계에서 초래될'지원율의 서열화'라는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이혜영 한국교육개발원 수석연구위원은 "선택 범위를 넓혔다고 하지만 원거리 통학에 따른 불편을 감수하려면 아무래도 경제적 여건이 뒷받침 돼야 한다"며 "이럴 경우 특정 계층의 강남 집중 현상이 지속돼 학교의 노력 여하에 관계없이 교육 격차가 확대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지금처럼 거주지가 특정학교의 배정확률을 결정짓는 폐단은 줄어들지 몰라도, 새로운 요인이 서열화 문제를 부각시킬 수 있다는 뜻이다.
■ 진학률 제고가 선호학교 지름길
고교선택제의 아킬레스건은 또 있다. 학생과 학부모가 학교 선택의 기준으로 삼을만한 자료가 거의 없다는 것이다. 이종태 전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장은 "우리나라 일반계 고교에는 문과와 이과라는 딱 하나의 세트 메뉴밖에 없다"며 "능력과 소질을 고려하지 않고 교육과정이 천편일률적이다 보니 공교육의 서비스 질은 낮기 마련"이라고 지적했다.
이 때문에 대학 진학률 등 객관적으로 수치화할 수 있는 학력 정보가 결국 고교선호도를 좌우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이에 대비한 일선 학교들의 움직임도 부쩍 바빠졌다. 용화여고는 1년에 입시설명회를 20차례 이상 열고 있다. 주요 대학 입학관계자 초청 설명회는 물론 학교 진학관리기획부에서도 수시로 학생들에게 진학 정보를 제공한다.
박흥원 교장은 "교육의 시대적 흐름이 다양성 추구라는 점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입시 결과를 중시하는 수요자의 현실적 판단도 외면할 수 없다"고 말했다.
공립고의 위기감은 사립고에 비해 더욱 심각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사립고가 예산을 무기로 학력 증진 경쟁에 적극적으로 뛰어들 수 있는 반면 공립고는 예산과 교육과정 운영 등을 교육청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 공립고 교장은 "공립고는 교육 목표에 맞는 교사를 맘대로 뽑지도 못하고 그나마 일정 근무 기간이 지나면 기계적으로 전보발령을 내야 한다"며 "손발이 꽁꽁 묶인 상황에서 살아 남으라고 강요하니 답답할 뿐"이라고 말했다.
■ '기피 학교'의 비애
서울 강남 지역에 있는 사립 A고는 이른바 '기피 학교'로 분류된다. 좋지 않은 접근성과 저조한 대학 진학률이 가장 큰 이유다.
A고는 우선 지리적 여건에서 절대적으로 불리하다. 강남의 외곽에 자리해 버스노선이 드문데다 지하철을 이용하더라도 언덕길을 15분 정도는 걸어야 학교에 겨우 도착할 수 있다.
저조한 진학률은 학부모들의 관심에서 점점 멀어지게 한다. 유명 학원가를 끼고 있는 인근 2개 고교가 소위 'SKY(서울대 고려대 연세대)'대학에 매년 수 십 명씩 진학시키는 등 대학입시에서 탁월한 성과를 내고 있는 반면 A고는 한자리 숫자도 유지하기 힘들다.
그런 A고도 한 때 명문고 소리를 들었다. 1980년대 초.중반만 하더라도 명문대에 한 해 80명 이상을 입학시켰기 때문이다. 하지만 80년대 후반 근거리 배정원칙이 적용되면서 상황은 돌변했다.
배정 범위가 학교 인근 지역으로 한정되자, 우수 학생들의 발걸음이 뚝 끊겼다. 학교 주변은 서민층 밀집지역이고, 서울의 대표적 달동네까지 끼고 있었던 탓이다.
결과는 입시 성적으로 연결됐다. 명문대 진학률이 뚝 떨어지면서 학부모들이 외면했다. A고에 배정되면 전학을 가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2010년부터 시행되는 고교 선택제는 이 학교 B교장에게는 '쓰나미' 같은 존재다. 그는 "고교선택제가 실시되면 정원을 채우지 못할 가능성이 커 솔직히 두렵다"고 털어놓았다.
B교장은 "가시방석에 앉아 있는 기분"이라고도 했다. 인근 학교 한 곳은 지난해 두 자릿수의 서울대 합격생을 냈는데도 재단측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는 이유로 교장을 해임시켰기 때문이다.
고교선택제가 시행되려면 2년이나 남았지만 상황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는데 B교장의 고민이 있다.
B교장은 재단을 원망하는 눈치다. 재단측은 4년 전 입시에 도움이 되는 국어ㆍ영어ㆍ수학 과목을 가르칠 인력이 턱없이 모자랐는데도 산하 실업계열 학교를 없애면서 실업과목 중심의 교사들을 모두 A고로 전환시키는 '우'를 범했다.
재단측의 조치에 실망한 교사 중 10명 이상이 다른 학교와 학원으로 옮겼다. 비선호학교 이미지를 자초했음은 물론이다.
B교장은 한숨을 지으면서도 시교육청의 정책에 강한 불만을 터뜨렸다. 그는 "선택제를 거부할 수는 없는 일"이라며 "하지만 선택제를 제대로 하려면 비선호학교에 대한 정확한 실태조사 후 부작용 방지를 위한 대책이 사전에 마련돼야 하며, 학교의 학생 선택권도 함께 보장해 줘야 한다"고 말했다.
김이삭 기자 강희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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