균형은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은 상태다. 고대 윤리학자들은 그것을 '중용'이라는 이름의 덕(德)으로 떠받들었고, 근세 독일 철학자들은 그것을 미적 형식 원리의 하나로 추켜세웠다. 이상적 민주주의는 왼쪽의 평등과 오른쪽의 자유가 균형에 다다랐을 때 이뤄진다. 평등이 쇠약할 때, 자유는 힘세고 사나운 이들이 약하고 순한 이들을 짓밟으며 멋대로 이익을 취할 수 있는 권리로 변질된다. 자유가 비실거릴 때, 평등은 다수의 횡포와 중우정치로 통하는 길을 닦는다. 균형은 삶의 여러 영역에서 인류가 오랜 세월 좇아 구해온 어떤 이상태(理想態)다.
▲ 찰랑거리는, 기우뚱한 균형
철학자 김진석(인하대 교수)의 근저 <기우뚱한 균형> 은 인류의 이 오랜 공안(公案)을 풀어보려는 끈질긴 사유의 한 열매다. 네 해 전, 꽉 죄는 철학의 거푸집을 깨고 나와 <폭력과 싸우고 근본주의와도 싸우기> 로 사회정치적 발언을 하기 시작한 저자는 앞선 책의 문제의식을 이어나가면서, 그러나 구체성의 살을 한층 더 불려, 현실정치에 개입하고 있다. 폭력과> 기우뚱한>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의 한 끝머리를 난해한 문체로 농한 그의 첫 저서 <탈형이상학과 탈변증법> (1992)의 인내심 많은 독자들은, 중도를 지향하는 담백한 문체의 정치학자를 <기우뚱한 균형> 에서 발견하고 꽤 놀랄 것이다. 그 중도는 지난해 대선을 앞두고 농담처럼 펄럭였던 우(右)와 극우 사이의 중도가 아니다. 김진석의 중도는 표준적 민주주의의 이념적 정규분포를 지탱하는 중도이자 균형이다. 기우뚱한> 탈형이상학과>
그 균형이 '기우뚱한 균형'인 것은, 저자의 설명에 따르면, 끊임없이 우로 좌로 부딪쳐야 기우뚱 무게를 잡을 수 있기 때문이고, 그렇게 잡은 균형도 무거운 중심추를 마음놓고 바닥에 늘어뜨려 놓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동요하는 우파와 좌파에게 권하는 우충좌돌 정치철학'이라는 이 책 부제에 기대어, 그의 기우뚱한 균형을 '다소 편파적인 균형'이라 해석하고 싶다.
관용어 좌충우돌을 '우충좌돌'로 바꿔놓은 데서도 짐작할 수 있듯, 그의 비판이 먼저 겨냥하는 것은 우파다. 그것은 한국 정치지형에서 우파의 힘이 압도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저자가 생각하는 자신의 '기우뚱한 균형'은 왼쪽으로 살짝 기운 균형일 것이다. 그러나 그의 펜촉은 곧 이어 좌파를 겨눈다. 그의 생각에 한국의 일부 좌파는, 현실과 동떨어진 관념 속에서, 실천 가능성 너머의 근본주의로 치닫고 있기 때문이다.
김진석은 그런 기우뚱한 균형 속에서 보편주의와 실용주의 사이를, 솔직함과 뻔뻔함 사이를, 위선과 위악 사이를, 자율과 공공 사이를 걷고 기고 날고 미끄러진다. 사이를 두고 맞버티는 여러 쌍의 테제들은 한국사회의 구체적 사건들과 들러 붙어있다. 저자가 이 책에서 이론가인 것 이상으로 비평가라는 뜻이다. 그 기우뚱한 균형은 또 위태로운 균형이기도 하다. 세상의 이상적인 것은 모두 위태롭다. 이상(理想)은 늘 정상보다 이상(異常)에 가까우므로.
나는 그의 '기우뚱한 균형'을, 저자의 자기정향(自己定向)과 달리, '오른쪽으로 살짝 기운 균형'으로 여긴다. 중도우파를 자처하는 내가 보기에도, 시장사회나 전쟁에 대한 그의 관점이 사뭇 유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이 참여 지식인으로서 실천할 수 있는 것 너머를 이야기하지 않는 절제는 이 책의 두드러진 미덕이다. 언어의 변증법에 현실을 억지로 꿰맞추지 않는 정직함도 그렇다.
▲ 행할 수 있는 것만큼만 말하기
철학은 개념의 생산이라고 들뢰즈는 말했다. 그렇다면 니체의 '초월'을 땅바닥으로 끌어내린 '포월(匍越)'이라든가,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소외' 개념에 적극성과 능동성의 옷을 입힌 '소내(疎內)' 따위의 개념을 만들어낸 김진석은 분명히 철학자다. 그러나, 역시 그 자신이 창안한 '기우뚱한 균형'이라는 개념을 열쇠말로 삼아 한국 정치를 세심히 살필 때, 그는 정치학자 같기도 하다.
고종석 객원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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