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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설거지

입력
2008.09.17 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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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회는 이 달 초 이색적인 보고서를 표결에 부쳤다. '남자는 세차하고, 여자는 부엌에서 설거지하는' 식의 광고를 중단할 것을 광고업자들에게 촉구하는 내용이었다. 그 같은 광고가 남성과 여성의 전통적 성 역할을 끊임없이 주입한다는 이유에서였다. 표결 결과는 찬성 504, 반대 110, 기권 22의 압도적 찬성. 보고서 제출을 주도한 스웨덴 출신 에바 브리트 스벤손 의원은 "남성과 여성 역할의 도식적 묘사는 전통적 성 역할과 다른 분야에서 남녀의 능력 발휘를 막고 청소년의 교육이나 경력 선택을 제한한다"고 지적했다.

▦ 우리나라 국회에서 이 보고서가 표결에 부쳐졌다면 압도적 찬성을 얻기는 어려웠을 터이다. 최근 들어 우리 사회도 전통적 성 역할에 대한 고정관념이 완화되고는 있지만 남자가 할 일, 여자가 할 일의 구분은 아직도 강고하다. 여자들의 명절 증후군을 심각하게 얘기하면서도 이번 추석연휴에 앞치마 두르고 부엌에 들어가 설거지를 한 남자들이 과연 얼마나 늘었을지 궁금하다. 평소 가정 생활에서도 설거지가 산더미처럼 쌓였는데 식사가 끝나자마자 TV 앞에 가 앉는 간 큰 남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 귀찮은 설거지도 요령을 알고 하면 즐겁고 재미 있다. 기름이 묻은 그릇과 묻지 않은 그릇의 구분이 첫째 요령. 기름기 없는 그릇은 세제를 안 쓰고도 깨끗이 세척할 수 있다. 기름기 많은 그릇도 키친 타올로 닦아내거나 뜨거운 물로 한번 두른 뒤 아크릴 행주를 사용하면 세제 없이도 꽤 깨끗하게 닦아낼 수가 있다. 세제를 사용하지 않으니 헹구는 데 물이 적게 들고 시간도 절약되며 환경에도 좋다. 기름과 친한 아크릴 소재에 생각이 미치면 화학의 세계로 들어가고, 환경 친화적 생활방식을 생각하면 생태주의자가 되기도 한다.

▦ 철학의 수단인 언어의 부정확성을 고민하는 철학자들은 행주와 설거지 물이 깨끗하지 않지만 그릇을 깨끗하게 닦아내지 않느냐고 자위한다. 철학은 설거지라고 한다. 잡것들을 씻어내고 그릇을 잘 정돈하듯이 자기가 아는 것을 정리하는 것이 바로 철학이라는 것이다. 그릇과 함께 마음을 닦으면 마음 수련이 된다. 한국축구는 설거지를 더 잘할 필요가 있다. 주말골퍼가 설거지를 잘하면 핸디가 줄어든다. <설거지 그리고 주식투자> 라는 책도 있으니 주식투자의 비결도 설거지인 모양이다. 이 정부는 쇠고기 졸속협상 파문을 전정권의 설거지라고 변명하나 정작 설거지가 시원찮아서 일어난 일이다.

이계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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