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안 하라 지음ㆍ차미례 옮김/삼천리 발행ㆍ512쪽ㆍ1만8,000원
'자유를 위해서/ 비상하여 본 일이 있는/ 사람이면 알지/ 노고지리가/ 무엇을 보고/ 노래하는가를/ 어째서 자유에는/ 피의 냄새가 섞여있는가를/ 혁명은/ 왜 고독한 것인가를/ 혁명은/ 왜 고독해야 하는 것인가를'
한국의 혁명의 시인 김수영은 시 '푸른 하늘을'에서 자유의 피 냄새를 노래했다. 지구상에서 우리의 대척점에 위치하는 칠레의 9월도 바로 자유, 피 냄새로 가득하다.
요즘 사람들에게야 9ㆍ11이란 숫자는 미국이 테러를 당한 날로 기억되기 십상이다. 그러나 그에 앞서 9ㆍ11은 35년 전 칠레에서 피노체트가 쿠데타를 일으켜 집권한 날이었다. 칠레 사람들에게 9월은 더욱 각별하다. 정치 지도자 살바도르 아옌데(11일), 노벨문학상의 시인 파블로 네루다(23일)가 군부에 의해 사라져야 했다. 보통 사람의 친구, 정권의 눈엣가시였던 빅토르 하라(1932~1973) 또한 그 달에 세상을 떴다.
빅토르 하라는 칠레의 민중 가수, 연출가, 시인 등의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각인됐다. 군부 통치에 대한 저항으로 그의 노래와 육체에는 처참한 압살이 자행됐다. "기타를 치던 손가락이 전부 짓뭉개지고 두 손목까지 부러진 그의 시신"(487쪽)은 군분의 만행을 단적으로 드러냈다. 빅토르 하라는 또한 때마침 범람해 온 미국의 상업주의 문화, 팝송 등에 맞서 벌어진 칠레의 민요 채집운동 등 청년 저항운동의 상징이기도 했다.
이 책은 가난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나 1973년 쿠데타로 집권한 피노체트 정권에 저항하다 학살되기까지 빅토르 하라의 삶을 영국 태생의 무용가인 부인 조안 하라의 입으로 정밀하게 복원한다. 격동의 시대, 영국인 발레리나와 칠레의 가난한 학생의 진솔한 사랑 이야기는 칠레 현대사의 격랑 속에서 더 빛난다. 사랑처럼, 혁명은 필연이었다. "예술가란 진정한 의미에서 창조자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야 혁명가가 되는 것이다… 그 위대한 소통 능력 때문에 게릴라와 마찬가지로 위험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234쪽) 자신의 노래를 필요로 하던 곳이면 어디든 달려가던 1969년 하라가 남긴 말이다.
이 책은 혁명의 기록이면서, 동시에 지나가 버린 공동체적 생활양식을 되살리게 하는 역사책이기도 하다. "인킬리노(가난한 소작농)의 가족이나 농업노동자들은 치차(약한 포도 발효주)를 한잔 하면서, 옛날 이야기와 기타 소리에 맞춰 부르는 전통 가요를 들으면서, 집단 노동의 긴긴 밤을 축제 마당으로 바꿔 놓는다"(96쪽) 빅토르 하라가 태어난 전형적인 시골 마을, 산티아고 변두리의 빈민가 사람들이 꾸었던 꿈과 강퍅한 삶, 칠레 대학의 학생운동, 민중 벽화 운동, 민속 음악 운동, 좌파 내부의 노선 투쟁, 극우파들의 대응, 다국적기업과 대기업의 횡포 등 지난 시절 한국의 모습을 보는 듯한 기시감이 각별한 감회를 불러 일으킨다.
빅토르 하라가 살해됐다는 소식에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이 체포될 위험마저 무릅쓰고 (묘지의) 높은 벽을 기어 올라가서 깡통이나 작은 항아리를 철사나 끈으로 묶어놓으면서까지 꽃을 꽂아"(16쪽) 두었다. 기타로 민요를 불러주던 영웅을 위해 어떻게든 조의를 표하려던 칠레 사람들을 그린 도입부다. 그리고 영국 영사의 호위 아래 두 딸과 함께 살륙의 현장을 찾은 조안의 시선으로 책은 시작된다. 입체적 전개방식 덕에 한 편의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는 듯한 감흥을 준다.
장병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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