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한 간에 평화가 잘 되고, 경제도 잘 되려면 빠뜨릴 수 없는 일이 있습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셔야 하고, 김영남 상임위원장도 건강해야 합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김영남 상임위원장 두 분의 건강을 위하여 건배!"
지난 해 10월 2일 2차 남북정상회담 첫날 저녁 평양 목란관.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주최한 만찬장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또 '사고'를 쳤다. 분위기가 무르익자 갑자기 마이크를 잡고 김 위원장의 건강을 위해 건배를 제의한 것이다. 남한 대통령이 공개석상에서 김 위원장의 만수무강을 기원했으니 참석자들이 놀랄 만했다. 국가보안법 상 찬양고무죄에 해당될 수도 있었다. 북측 관계자들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남측 언론에서 문제 삼지 않겠느냐"고 지레 걱정할 정도였다.
김 위원장의 건강 기원했건만
노 전 대통령의 건강 기원 건배 발이 안 먹혀 김 위원장이 이번에 쓰러졌는지, 아니면 그 건배 덕택에 그 정도에 그쳤는지는 알 수 없다. 어쨌든 이번 김정일 위원장의 중병설 파동은 그의 건강이 여러 의미에서 '소중'하다는 것을 일깨웠다. 청와대와 한나라당도 김 위원장이 '빠르게 회복 중이며 통치 능력을 상실하지 않았다'는 국정원 보고에 안도하는 분위기가 역력했다. 그제 한나라당 최고위원회의에서 공성진 최고위원은 "다행히 (김 위원장의) 병세가 호전됐다고 한다"고 말했는데, '다행히'라는 부사가 새삼스럽다.
김 위원장의 유고에 의한 북한의 급변사태가 한반도와 그 주변에 초래할 혼란을 언급할 것까지도 없다. 김 위원장이 곧 회복될 것이고 북한 내에 동요 조짐이 없다는데도 한국에 대한 국제금융가의 신인도 평가는 벌써 다르다. 정부가 발행하려던 외평채가 외국 금융기관들의 가산금리 인상 요구로 연기된 것은 바로 그 영향이다.
만약 한반도 긴장이 고조돼 국가 신용등급이 한 단계만 떨어져도 우리의 외채 규모를 감안할 때 연간 수십억 달러의 추가 금리를 지불해야 한다. 수출입에 미치는 영향은 또 다른 문제다. 청와대는 '대통령과의 대화' 효과로 민족 대이동 기간인 이번 추석을 전후해 이명박 대통령에 대한 국민여론이 반전되기를 기대한다고 한다. 하지만 이번 추석 잔칫상의 최대 화제는 '이명박'이 아니라 '김정일'이 되지 않을까 싶다.
평소 물이나 공기의 고마움을 모르고 지내다가 오염 등으로 사정이 나빠졌을 때야 비로소 그 고마움을 알게 되는데, 남북관계도 비슷하다. 사람들은 지난 10년 간의 햇볕정책을 대북 퍼주기와 눈치 보기라고 쉽게 비난한다. 하지만 김대중, 노무현 정부 시절 들어간 비용과 노력이 아니었다면 남북긴장 완화가 거저 얻어졌을 리 없다. 경제를 살리겠다는 이명박 정부가 남북관계 리스크를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이명박 정부는 이미 그 대가를 치르고 있는 중이다.
6ㆍ15와 10ㆍ4에서 답 찾아야
개성공단 활성화 등 남북경협의 확대는 단순히 북한에게만 시혜가 되는 게 아니다. 이제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활로를 찾기 어려워진 우리 중소기업에 유일한 탈출구이다. 시베리아 진출을 비장의 국가번영책으로 꼽는다는 이 대통령의 원대한 구상은 북한땅을 거쳐가지 않는다면 한낱 공상에 불과하다. 북핵 문제 해결과 함께 전개될 북한의 SOC(사회간접자본) 개발은 이 대통령의 장기인 토목적 접근에도 황금 같은 기회를 제공하지 않겠는가. 이미 한계에 다다른 남한 땅의 토목공사만으로는 이 대통령의 '7ㆍ4ㆍ7'기를 영원히 이륙시킬 수 없을 것이다.
이쯤해서 이 대통령은 '6ㆍ15'와 '10ㆍ4' 선언문을 찬찬히 읽어보시는 게 좋겠다. 두 선언문을 읽는 데 자존심은 접어둘 필요가 있다. '7ㆍ4ㆍ7' 공약 중 적어도 나중의 7, 즉 세계 7위의 경제대국은 남북한을 합한 7,000만 정도의 내수시장을 확보해야만 꿈꿔볼 수 있다. 영민한 이 대통령이라면 두 선언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이계성 논설위원 한반도평화연구소장 wks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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