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우리나라 영화계는 매우 우울하다. 심지어는 위기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위기까지는 아니고 힘든 것은 사실이다. 왜 그런지, 수치로 설명하고자 한다. 숫자로 이야기해야 이해하기가 쉽기 때문이다.
한국영화를 관람하러 오는 사람의 숫자를 수입 영화의 경우와 비교하는 것을 시장 점유율, 즉 마켓 셰어(Market Share)라고 하는데 이것이 2001년부터 엄청나게 커지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2003년에는 53.5%가 되었고 드디어 2006년에 63.8%라는 경이적인 점유율을 기록해서 문화계 사람들을 흥분 시켰다. 다시 말하자면 100명의 영화 관객중에 64명이 외화가 아닌 한국영화를 봤다는 것이다.
좋아하고만 있을 일이 아니다. 그렇게 잘 나가더니만 지난해(2007)에 뚝 떨어져서 간신히 50%를 턱걸이했다. 올해는 어떠할는지 걱정이고 그래서 우울한 것이다. 그러면 왜 그럴까? 몇 가지 이유가 있다고 전문가들은 말하고 있다. 첫째, 저작권을 위반하는 불법 복제를 들고 있고, 둘째로는 소재 부족을 말하고 있다.
소재가 부족하기로는 우리나라만 그런 것은 아니다. 심지어는 영화 천국인 할리우드도 같은 고민을 하고 있다고 한다. 이런 때에 우리가 혹시 잊어버리고 있을지 모를 소재 한 가지를 되살려 보고자 한다. 이른바 ‘북한군 판문점 도끼만행사건’이 그것이다. 이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면 어떠할까 하는 생각에서 소개하고자 한다.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은 전 세계에서 하나 밖에 남지 않은 독특한 긴장 지역이다. 이곳에서 1976년 8월 18일에 끔찍한 사건이 벌어졌다. 그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한국군과 미군, 그리고 우리나라 민간인들이 공동경비구역 안에 있는 미루나무 가지치기를 하고 있었다. 미루나무는 지나치게 무성해지면 당연히 가지치기를 해 주어야 하는 것이고, 특히 시야가 가려서 경비에 지장이 있을 때에는 더 그렇다. 가지치기 작업은 민간인이 했지만 한국군과 미군은 이들을 보호, 감독하고 있었다.
한참 작업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30여명의 북한군 장병들이“왜 나무를 자르느냐?”면서 도끼와 곡괭이를 들고 공격을 했다. 그리고 그들은 미군 2명을 도끼로 살해하고 한국군등 9명에게 중경상을 입히고 달아났다. 순식간에 일어난 사건이었고 실로 중대한 일이었다. 미군 당국은 즉시 2개 전투비행단을 실전 배치했고 제7함대의 항공모함을 보냈다. 북한도 휴전선 부근에 비상사태를 선포하는 명령을 내렸다.
자칫하면 전쟁이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이때 김일성이 각서로 유감을 표시했고 미국이 이를 받아들여 전쟁의 위기는 면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 사건으로 생명을 잃은 두 명의 미군 장교들과 그들의 가족들은 어찌 되는가. 더구나 “도끼로 사람을 쳐서 죽였다”는 뉴스가 전 세계에 타전이 되었으니 그 부끄러움을 어찌할 것인가.
나는 그 때 뉴욕에서 신문기자 생활을 하고 있었다. 내가 아는 미국 친구들이 ‘도끼’이야기를 할 때마다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었다. 코리안은 그렇게 잔인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 주고 싶었다. 그래서 미 육군 사관학교(West Point)를 찾아갔다. 살해당한 장교는 2명인데 그 중의 하나는 보니파스(Bonifas) 대위이고, 또 하나는 바레트(Barret) 중위였다. 이들에 대해 사후에 일계급 특진 메달을 주면서 가족을 위로하는 자리를 사관학교 교장이 마련한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교장실로 전화를 했다. “나는 한국의 신문 기자인데 그 자리에 꼭 참석하고 싶다”고 간청을 했다. 교장(미 육군중장)은 나를 초청해 주었다. 나는 꽃을 들고 교장실로 갔다. 물론 한국 사람은 나 혼자였다.
육사 교장실에서 나는 특진한 보니파스 소령의 젊은 미망인을 만났다.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미망인이 어찌나 슬피 우는지 나는 들고 간 꽃을 전해 줄 수가 없었다. 그녀도 그녀지만 3살과 4살 된 아주 귀엽고 예쁜 두 명의 딸들을 보는 순간 나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오히려 육사 교장이 나를 위로해 주는 입장이 되었다. 먼 훗날 이 어린 딸들이 “우리 아빠는 어떻게 해서 세상을 떠났느냐”고 엄마한테 물어오면 뭐라고 대답할 것인가?
보니파스 소령의 유해는 육사 안에 있는 묘지에 안장되었다. 육군사관학교는 뉴욕주 허드슨강 북쪽에 자리 잡고 있는데 보니파스 소령의 산소는 강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나는 이곳을 그 후로 여러 차례 방문했다. 그 때마다 항상 산소는 미망인이 갖다 놓은 꽃으로 둘러 싸여 있었다. 나도 꽃을 가지고 갔다. 그리고 “당신에게 빚이 있는 어느 코리안이”라는 리본을 달았다.
그러던 어느 날 보니파스 소령의 미망인한테서 편지 한 통이 왔다.“당신에게 항상 고마움을 느낍니다. 너무 미안해 하지 마세요. 나는 한국 사람들이 따뜻한 마음을 갖고 있다는 것을 잘 압니다.”는 내용이었다. 그녀는 내 마음을 읽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편지를 읽으며 크게 울었다.
며칠 후, 당시 한국일보의 장강재 회장이 업무상 뉴욕을 방문했다. 저녁식사 자리에서 나는 장회장에게 “내일 오전에 3시간정도 짬을 내주십시오. 한국의 언론사 대표로서 꼭 가실 데가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튿날 아침에 장회장과 나는 육군사관학교에 갔다. 보니파스 소령의 산소에 가서 준비해 간 꽃을 놓고 묵념을 했다. 조화에는“당신은 절대 외롭지 않습니다. 한국일보-코리아타임스 회장 장강재”라는 리본을 달았다. 나는 장회장의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을 봤다. 그 장회장도 지금은 고인이 되었다.
이미 32년이 흘렀다. 그때 그토록 슬피 울던 미망인이 회갑 나이가 되고, 천진난만하던 예쁜 딸들도 30대 후반의 나이가 되었을 것이다. 그들은 어찌 지내고 있는지. 나는 혹시 뉴욕에 갈 일이 생기면 반드시 육사에 있는 보니파스 소령의 산소를 다시 찾아 가리라고 마음먹고 있다.
아침 지하철 훈남~알고보니[2585+무선인터넷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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