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중에서 푸슈킨 등 거의 모든 러시아 고전들을 탐독했다. 러시아 문학이 내게 준 영향은 측량할 수 없다."
1999년 5월 28일 러시아를 방문 중인 김대중 당시 대통령이 모스크바 대강당에서 한 연설 중 한 대목이다. "러시아 고전을 읽은 것만으로도 감옥에 간 보람이 있었다고까지 생각한다"는 말도 했다. 대강당을 가득 채운 600여명의 교수 학생들은 경외감을 담은 박수로 화답했다. 마침 그 때는 러시아 문호 푸슈킨의 탄생(1799년 6월6일) 200주년을 기념하는 시즌으로 모스크바는 푸슈킨의 사진과 그림, 시로 넘치고 있었다. 모스크바 사람들은 DJ에 우호적 시선을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DJ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러시아 의회 지도자들과의 면담에서 톨스토이, 도스코예프스키를 논하고 피터 대제의 개혁을 역설했다. 그리고 그 말미에 "이렇게 위대한 역사와 문화를 가진 러시아가 한국의 포용정책을 지지해달라"고 했다. 자기 나라 문인의 작품에 자기들보다 더 정통한 외국 지도자의 요청을 누가 거부할 수 있겠는가.
DJ는 이처럼 외교에서 탁월했다. 외환위기도 극복했다. 정보화, 생산적 복지, 시장경제와 민주주의, 포용정책 등 새로운 아젠다도 만들어냈다. 그러나 그런 DJ도 아들들과 측근들의 비리로부터 자유롭지 못해 임기 후반 레임덕을 겪어야 했다.
그런 탁월한 지도자로는 김영삼 전 대통령도 있다. 그는 임기 초반 공직자 재산공개와 금융실명제를 밀어붙였다. 군의 절대적 세력이었던 하나회도 해체했다. 지금 보면 누구나 마음 먹으면 할 수 있었을 것 같지만 하나회 해체나 금융실명제 실시는 당시로서는 혁명처럼 어려운 일이었다. 지금 한국 사회가 이 정도라도 올라온 데는 YS의 역할이 컸다.
그 점에서 YS는 영웅으로 불릴 수도 있었다. 그러나 임기 말 아들 현철씨를 구속시켜야 했고 외환위기를 맞아 한국 경제의 파탄을 목도해야 했다.
YS DJ 모두 민주화 투쟁의 도덕적 우월성을 바탕으로 뛰어난 업적을 거둔 지도자였지만 영웅으로 자리매김하지 못하고 오점과 회환을 안은 채 물러나야 했다.
우리 사회는 그만큼 인색한 것인가. 그럴 수도 있지만 그 인색한 평가에는 영웅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바람이 너무 큰 탓도 있다.
우리는 5년마다 영웅을 요구한다. 대선 때가 되면, 어려운 삶을 일거에 해결해주고 난마처럼 얽힌 갈등을 단칼에 해결하는 영웅이 오기를 기대한다. 이명박 대통령도 그래서 뽑았다. 샐러리맨의 신화가 재연될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그것은 신기루가 되고 있다. 이 대통령이 기대에 못 미친 측면도 있지만 우리 사회의 영웅을 기다리는 심리가 너무 컸기 때문이다.
그럼 기대를 줄여야 하는가. 그렇다. 현대사회에서는 헤라클레스나 아킬레우스처럼 혼자서 세상을 뒤바꿀 수 있는 영웅은 없다.
그래서 영웅이 없는 시대를 위한 체제개편을 제안해보고 싶다. 바로 개헌이다. 5년 단임의 대통령으로 이 시대를 감당하기에는 너무 벅차다. 단 한 사람에 모든 것을 걸었다가 실망하는 위험을 감수하기보다는 권력과 책임을 분담하는 집단적 리더십을 택해보자는 것이다. 그게 내각제일지, 이원집정부제일지 모르지만 그런 논의를 일단 시작해보자. 이제 영웅이 없다는 현실을 우리 모두 직시하자는 것이다.
이영성 부국장 겸 정치부장 leey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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