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현종 지음/문학과 지성사 발행ㆍ104쪽ㆍ7,000원
'시 완벽주의자' 정현종(69) 시인이 아홉번째 시집 <광휘의 속삭임> 을 상자했다. 제1회 미당문학상 수상작을 표제로 한 이 시집에는 <견딜 수 없네> (2003) 이후 5년 동안 쓴 시 60편이 묶였다. 그 사이 시인은 23년간 재직했던 모교(연세대)의 교수 자리에서 물러났으며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고 산책을 하며 틈틈히 시를 써왔다. 견딜> 광휘의>
시인은 시어의 병치와 관념어의 나열, 회화체와 이미지의 연결 등 초기 시에서 부단히 시도했던 언어 실험을 자제한다. 그렇게 형식적 긴장감을 누그러뜨린 정현종의 새 시들을 관류하는 정조는 남은 삶을 즐기려는 편안함이다. 그것은 주로 소소한 일상에 대한 감사로 표현된다.
군밤 한 봉지를 사 들고 귀가하면서 '버스를 타고 무릎 위에 놨는데, 따뜻한 온기가 느껴진다/ 갓 구운 군밤의 온기- 순간/ 나는 마냥 행복해진다'('오 따뜻함이여')고 탄복하거나, 베니스 여행중 이탈리아인 가이드가 베풀어준 작은 친절을 떠올리며 '날씨는 음산하고/ 욕망도 그렇고/ 자본은 냉혹하고/ 물결은 차가운데/ 따뜻한 불꽃 하나/ 내 옆에서 타고 있다'(동트는 마음)고 쓰기도 한다.
1965년 등단, 43년이라는 시력을 쌓아온 시인이 시로부터 도망가겠다고 읖조리는 언어들. 그것은 한편으로 장엄하고, 한편으로 쓸쓸하다. '잠결에/ 시가 막 밀려오는데도…/ 하여간 그런 시가 밀려오는데도/ 나는 일어나 쓰지 않고/ 잠을 청하였으니…'('시가 막 밀려오는데')라고 딴청을 부리다가 '시여/ 굶어 죽지도 않는구나'('시 죽이기')라고 짐짓 질린 척하기도 한다. 급기야 '지금부터 쓰는 시는/ 시집도 내지 말고/ 다 그냥/ 공기 중에 날려버리든지/ 하여간 다 잊어버릴란다/ 그럴란다(아이구 시원해)'('지금부터 쓰는 시는')라고 공언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은 시에 대한 사랑을 역설적으로 포장한 푸념에 가깝다. 그 푸념은 '오늘의 시의 운명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의 쪽박으로 구걸하는 거지 자기의 명성의 쪽박으로 구걸하는 건 아니다. 죽음으로 구걸하는 거지 살아 남음으로 구걸하는 것은 아니다'('사랑사설 하나'ㆍ1972)라고 시를 향해 죽음을 불사한 사랑을 맹세하던 30대 정현종의 포즈와 다르지 않다. 달아나려고 달아나려고 해도 늙은 시인은 여전히 시인됨이라는 천형(天刑)에서 멀리 달아나지 못했다.
이왕구기자 fab4@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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