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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명수 칼럼] 말하는 집, 꿈꾸는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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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명수 칼럼] 말하는 집, 꿈꾸는 집

입력
2008.09.12 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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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보빌딩의 '광화문 글판'이 18주년을 맞아 그 동안 글 판에 새겼던 시와 격언 등을 모아 작은 책을 만들었다. 그 책을 읽으면서 나는 도시의 한 건물이 시민들의 좋은 친구로 자리잡게 된 지난 시간을 뒤돌아 보았다.

대한교육보험의 사옥인 교보빌딩이 준공된 것은 1980년 7월인데, 그 건물은 한 회사의 사옥에 머무르지 않고 서울에서 제일가는 명소가 되었다. 이제 우리는 교보빌딩이 없는 세종로, 교보문고가 없는 책 시장을 상상하기 힘들다. 준공 28년밖에 안된 건물이 이처럼 시민들의 마음과 생활 속에 깊이 자리잡게 된 것은 교육보험 설립자인 대산 신용호 회장의 꿈과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대산 신용호 회장과 교보빌딩

내가 신 회장님을 처음 만난 것은 교보빌딩이 문을 연 지 사오 년이 지난 1980년대 중반이었다. 초여름 어느 날 세종로를 걷던 나는 천지에 자욱한 라일락 향기에 놀랐다. 그 향기는 교보빌딩 녹지대에 심은 라일락 나무들이 뿜어내는 것이었다. 나는 한국일보 칼럼에 그 이야기를 썼고, 며칠 후 신 회장님의 점심 초대를 받았다.

"내가 그 라일락을 심은 사람입니다. 라일락 한 무더기를 만들려면 수십 포기를 합쳐 모양을 만들어야 하는데, 빛깔과 향기가 좋은 라일락을 구하느라고 전국을 다니며 애를 많이 썼어요. 도심을 오가는 시민들에게 라일락 향기를 선물하고 싶었어요. 해마다 꽃 향기가 진동해도 알아주는 사람이 없어 섭섭했는데, 이제라도 내 마음을 알아주시니 고맙습니다."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고 믿었던 그는 적자를 무릅쓰고 건물 한 층을 서점으로 꾸몄고, 발 디딜 틈 없이 사람들이 몰려와 책을 읽고 고르는 교보문고를 자랑스러워 했다. 교보빌딩은 교보문고가 있기 때문에 '사람을 만드는 집'이 될 수 있었다.

교보빌딩 건물 외벽에 글 판이 등장한 것은 1991년이었다. 나는 그것이 신 회장님의 선물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초여름이 되면 라일락 향기가 진동하고, 일년 내내 책을 사러 온 사람들이 북적대고, 책을 읽는 사람들의 지식과 꿈이 무럭무럭 자라는 건물이 이제 글 판을 통해 노래하고 말하기 시작한 것이다.

<개미처럼 모아라 여름은 길지 않다>

<봄에 밭을 갈지 않으면 가을에 거둘 것이 없다>

<떠나라 낯선 곳으로 그대 하루하루의 반복으로부터>

<가는 데까지 가거라 가다 막히면 앉아서 쉬거라 쉬다 보면 새 길이 보이리>

<사랑이여 건배하자 추락하는 모든 것들과 꽃피는 것들을 위해>

'광화문 글 판'은 지난 18년 동안 동서고금의 격언과 시 한 구절을 적어 교보빌딩 근처를 오가는 시민들의 마음을 적셔주었다. 때로는 지치고 아픈 사람들이 물 한 잔 마시듯 글 판을 읽었다. 신 회장이 2003년 86세로 별세한 후에도 글 판은 이어지고 있다.

서울에 세워진 수많은 건물 중의 하나인 교보빌딩이 '꿈꾸는 집', '말하는 집'으로 시민들의 사랑을 받게 된 것은 그 건물의 주인이 '꿈꾸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냥 나무를 심는 게 아니라 시민들에게 시원한 느티나무 그늘과 라일락 향기를 선물하겠다는 꿈을 꾸고, 수지계산을 떠나 서울에서 가장 좋은 자리에 가장 큰 서점을 만들겠다는 꿈을 꾸고, 도심을 오가는 사람들의 가슴을 적셔 줄 좋은 말을 내걸겠다는 꿈을 꾼 사람…그가 없었다면 교보빌딩은 대한교육보험의 사옥으로 끝났을 것이다.

멋진 꿈꾸는 부자들이 많아지길

요즘에는 많은 신축 건물들이 시민들에게 휴식처를 제공하고, 좋은 디자인으로 도시를 아름답게 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런 노력들이 열매를 맺어 곳곳에 좋은 건물들이 생겼으면 좋겠다. 꿈은 집을 집으로 끝나게 하지 않는다. 건축 설계가의 꿈 못지않게 건축주의 꿈이 중요하다. 멋진 꿈을 꾸는 부자들이 많아지면 좋은 세상이 앞당겨질 것이다.

장명수 본사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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