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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위기설, 무엇을 남겼나/ 정부도 시장도 언론도…한국적 냄비 근성이 禍 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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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위기설, 무엇을 남겼나/ 정부도 시장도 언론도…한국적 냄비 근성이 禍 키웠다

입력
2008.09.12 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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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뢰잃은 정부

'촛불' 끄려 기름 붓다가 '뒷북 진화'

환율 정책도 일관성 없이 오락가락… 시장 믿음 상실

초기에 '9월 위기설'은 주목하지 않아도 될 자그마한 회오리에 불과했다. 외국인들이 만기 도래하는 채권을 일제히 회수해 갈 거라는 시나리오는 현실 가능성이 극히 낮았고, 그 규모(67억달러)도 우리 금융시장에 직격탄을 날리기엔 미미한 수준이었다.

이런 '9월 위기설'이 갈수록 파괴력을 더해가며 초특급 태풍으로 돌변했던 데는 정부, 그리고 여당의 책임이 적지않다.

위기론 논란을 촉발한 건 애초 정부와 여당이었다. 촛불집회가 한창이던 6월, 임태희 한나라당 정책위의장은 "현재의 경제 상황이 외환위기 때와 비슷하게 흘러가는 조짐이 보인다"고 했다. 제2의 국제통화기금(IMF) 논란이 불거진 발단이었다. 이런 위기설 뒤에는 촛불집회를 잠재우기 위한 의도가 다분히 깔려있었다는 게 공통된 관측. 물론, 이명박 대통령이 해명한 것처럼 '9월 위기설' 같은 경제 파탄 상황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긴장감을 고취하기 위한 것이었다 해도, 당시는 이미 시중에 9월 위기설이 돌기 시작할 무렵. 정부와 여당이 위기설에 기름을 부은 꼴이었다.

대응도 안일했다. 정부가 부랴부랴 대책 마련에 나선 건 9월 들어 금융시장이 일대 혼란에 빠진 후였다. 정부의 두어 박자 이상의 늦은 대응에 시장의 불안은 공포를 넘어 패닉(공황) 상태로 치달았다. 긴급 경제금융상황점검회의를 열고, 증권사 애널리스트들을 만나고, 위기관리대책회의를 열고 부산한 수습에 나섰지만, 이미 금융시장이 입은 깊은 상처는 치유가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 본질은 정부의 신뢰 상실에 있다. 뒤늦게나마 "위기설은 사실이 아니다"고 거듭 목청을 높였지만, 시장은 믿으려고도, 또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냉온탕을 오간 환율 정책 등으로 시장의 믿음을 잃어버린 탓이었다. 김광두 서강대 경제학과 교수는 "가장 큰 원죄는 정부가 고환율과 저환율 정책을 오가는 등 일관성을 상실하면서 시장이 더 이상 정부 정책에 대한 신뢰를 갖지 않게 된 것"이라며 "정부 정책에 대한 믿음만 있었다면 위기설의 조기 진화가 가능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언제든 또 제기될 수 있는 크고 작은 위기설에 정부가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서는 지금부터라도 시장의 신뢰 회복에 온 힘을 쏟아야 한다는 지적이다.

이영태 기자 ytlee@hk.co.kr

◇ 협소한 시장

외국인 언제든지 입맛대로 '먹튀'

핫머니 놀이터 빌미 제거·시장 개방 치밀한 노력 필요

'쿠커블 사이즈(cookable size)'.

국내 민간 경제연구소의 한 전문가는 현재 한국 금융시장의 규모를 이렇게 표현했다. 외국인(글로벌 투자자금)들이 자신의 상황에 맞춰 이익을 챙기고 돈을 빼가기 쉬운, 다시 말해 '입맛대로 요리하기 쉬운' 크기라는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의 채권ㆍ주식시장 규모는 1,800조원 정도. 특히 이번 위기설의 진앙지가 됐던 채권시장은 글로벌 투자자 입장에서는 '메이저' 시장과는 거리가 멀다. 때문에 국내외 금리차를 이용해 무위험 차익거래를 노리는 외국인들의 핫머니가 들어오면 이번처럼 큰 혼란이 일어날 위험이 상존한다는 얘기다.

현대증권 이상재 경제분석부장은 "여전히 외국인의 국내 채권투자 규모는 50조원에 달해 이들이 기대했던 이익 규모가 줄어들거나, 스스로의 사정이 급해져 털고 나갈 경우 유동성 위기는 언제든 재연될 수 있다"며 "장기적으로 핫머니 유인의 빌미를 없애는 정책대응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주식시장도 맞춤하긴 마찬가지. 지난해 말부터 외국인의 순매도세가 그치지 않는데는 신흥국 증시 가운데 시장규모가 크고 거래량이 많으며 유동성이 풍부해 외국인들이 언제든 주식을 팔고 나가기 쉬운 환경이 주된 요인으로 꼽힌다.

올들어 급변동의 대표격인 외환시장도 외국인이 보기엔 소규모 지역시장(로컬마켓)일 뿐이다. 외화가 조금만 빠져나가도 환율이 폭등하다 보니 결국 소문만으로 심리가 형성되고 실제 환율이 들썩였다. 원화가 글로벌 통화가 아닌 현실에서 소규모 개방경제가 겪는 숙명이기도 하다. 여기에 자유롭게 드나드는 자본거래가 압도적으로 환율을 좌우하면서 실물경제와는 무관하게 움직이는 환율에 의한 피해도 속출했다.

근본적인 해법은 결국 시장규모를 키우는 것이지만 이는 당장 가능한 일이 아니다. 삼성경제연구소 권순우 거시경제실장은 "규모를 키우려면 더 개방하고 자유화해야 하지만 요즘 같은 세계적 위기 상황에서는 되려 역효과를 낼 수도 있다"며 "리스크를 감안한 정부의 치밀한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용식 기자 jawohl@hk.co.kr

◇ 쏠림의 투자자

시장 분위기 휩쓸려 투매 '도미노'

정보 부족이 불안 키워… 참가자들 소통 확대해야

9월 위기설의 진앙지는 채권시장이었지만 가장 큰 영향을 받은 곳은 외환시장과 증시였다. 9월 첫 주, 채권 금리는 변동성이 심각하지 않았지만 환율은 외환위기 당시를 떠올리게 할 정도로 '롤러코스터'를 타듯 움직였고, 증시 투자자들도 환율이 널뛰기를 하자 불안감에 주식을 내던졌다.

환율의 지나친 변동성은 국내 외환시장의 특수성에도 일부 원인이 있다. 금융연구원 이윤석 박사는 "달러화, 유로화, 엔화 등 국제 통화는 뉴욕 시장이 마감해도 시드니, 도쿄 등 다른 나라의 외환시장을 통해 24시간 꾸준히 거래되는 반면, 원화는 우리나라에서만 거래되다 보니 3시 장 마감 후 '종가'의 중요성이 지나치게 크고 시장 참여자들이 이를 '조작'하고자 하는 유인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정부가 '종가관리'를 위해 외환시장이 마감하기 직전에 대규모 개입을 하는 식이다.

그는 그러나 "하루에 1엔(1%) 정도의 오르내림은 보통인 엔화 등에 비하면 원화 변동폭이 평균적으로 크다고 하긴 어렵다"고 말했다. 즉, 이번처럼 심각한 변동성을 보인 것은 국내 외환시장의 내재적 요인보다는 심리적 '쏠림현상' 때문이 컸다는 것이다.

실제 한 외환 딜러는 "9월 위기설이 가능성이 없다는 전문가 말이 맞다 하더라도 지난 주 시장의 분위기는 '뭔가 있는 것 아니냐'는 것이었다"면서 불안 심리가 변동폭을 키우고 커진 변동폭이 다시 불안 심리를 키우는 악순환이 되풀이됐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심리적 쏠림현상을 가급적 줄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정부나 전문가들이 투명하게 가급적 많은 정보를 공개하고 앞으로의 계획을 설명해 시장 참가자들의 불안감을 줄이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하나대투증권 공동락 연구원은 "채권시장은 정보를 공유하는 집단이 매우 한정돼 있고 언론사 기자들도 채권시장 용어 등에 익숙하지 않아 일반인들과의 소통이 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면서 "채권 만기도래가 집중돼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위기설이 부풀려지게 된 배경에는 이 같은 소통의 문제도 있다"고 말했다.

금융연구원 이윤석 박사도 "문제가 생기면 '배후'를 찾는 방식으로는 시장과 정부가 소통할 수 없다"면서 "정부의 계획이 무엇인지 투명하게 밝히고 참가자들을 이해시키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최진주 기자

◇ 언론의 호들갑 보도

정치적 성향 맞춰 불안 '뻥튀기'

분석없이 자극적 기사·무분별한 외신 받아쓰기도

'위기'는 언론에게는 상품 가치가 높은 단어다.

9월 위기설이 지나치게 증폭된 데는 언론의 호들갑도 한 몫 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7월께 채권 및 외환시장에서 시작된 위기설을 가장 먼저 경제지들이 보도했고, 8월 베이징 올림픽이 끝난 후 국민의 공통 관심사가 사라지자 본격적으로 위기설 관련 기사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마침 치솟는 물가와 환율, 금리 등으로 국민들의 경제적 고통이 커지고 있었고, '9월 위기설'이란 국민들의 관심을 유도할 수 있는 재료였다.

한국은행과 경제전문가들이 9월 위기설이 실현될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주장했지만, 일부 언론들은 뚜렷한 근거 없이 "해외 경제상황에 따라서는 외국인들이 일시에 채권 매도에 나설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며 불안감을 조장하는 표현을 사용했다.

일부 언론사들은 위기설의 실체에 대한 객관적 분석보다 논조와 정치적 성향에 맞춘 기사를 내보내기도 했다. 이달 1일 주식 및 외환시장이 패닉 현상을 보이자 일부 언론들은 이를 광우병 사태에 비유하며 '괴담'으로 치부했고 다른 언론은 "정부 못 믿겠다… '셀 코리아' 가속화"라는 자극적인 제목으로 정부의 잘못 때문에 위기가 실제로 나타났다는 식의 해설기사를 썼다.

근거가 부족한 해외 언론 '받아쓰기'도 고질적 문제였다. 대표적인 것이 영국 일간 더 타임스 인터넷판의 1일자 기사였다. 신문은 "한국이 검은 9월로 향하고 있다"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한국이 외환위기로까지 가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 기사는 외환보유고 논란 등 상당수 국내에서 생산된 위기설에다 잘못된 근거까지 덧붙여 불안감을 조장한 기사였는데도 본보를 포함, 여러 언론들이 이를 보도했다.

이 보도는 국민들의 '외환위기 트라우마(충격후 스트레스장애)'를 자극했다. 일부 네티즌들은 외환위기 당시에도 외신들이 우리나라의 외환위기 가능성을 경고했지만 정부는 사실 무근이라고 일축했던 과거를 회상하며 이 기사를 퍼 날랐다.

전문가들은 무분별한 외신 받아쓰기가 오히려 다국적 금융자본의 손에 놀아나는 꼴이 될 수 있다고 경고한다. 금융연구원 이윤석 박사는 "언론플레이를 통해 자기들에게 유리한 상황을 조성, 비겁한 방법으로 이득을 취하려는 세력이 분명히 존재한다"면서 언론이 외신에 대해서도 분석적이고 비판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최진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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