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와 종교, 종교와 문화는 서로 소통해야 합니다."
한국 종교계에는 '수유리 모델'이라는 것이 있다. 서울 강북구 수유동에 있는 송암교회, 수유1동성당, 화계사가 해마다 함께 바자회를 열면서 동네주민 1만여명이 참여하는 강북 지역의 대표적 축제가 돼 종교 화합을 이룬 것을 일컫는 말이다.
천주교 지식인 모임 '명례방포럼'의 지도신부로 있는 조군호(59ㆍ서울 역삼동성당 주임) 신부는 수유리 모델의 단초를 만든 인물이다. 조 신부가 9월말부터는 강남 한복판에서 종교와 문화의 소통을 위한 '가톨릭 문화강좌'를 연다기에, 그를 만나 종교와 종교, 문화 간의 소통과 화해에 대해 들어보았다.
"1983년 신설된 수유1동성당에 부임했을 때 송암교회의 담임목사이셨던 고 기원형 목사님이 장로 몇분과 몸소 찾아와 축하인사를 하셨어요. 30대의 젊은 신부가 60대 노 목사님의 인사를 받으니 상당히 당혹스러웠는데 그게 시작이었어요."
기 목사는 40대에 이미 신부전증을 앓는 신자에게 신장 한쪽을 떼어주는 등 사랑을 실천하는 목회자로 신망이 높았다고 조 신부는 회고했다. 86년 성당 신축을 위한 바자회 장소가 마땅치 않아 고민하던 조 신부가 그에게 고민을 털어놓자, 기 목사는 흔쾌히 인근 한신대 대학원 교정을 사용할 수 있도록 주선했다.
한신대 바자회는 두 차례 열렸고 덕분에 성당 건물을 세울 수 있게 됐다고 한다. 조 신부는 보은의 답례로 한신대가 세운 송암교회 예배당에 커튼을 해줬고, 이같은 우호관계는 양측 성당과 교회의 교역자들이 매년 간담회를 갖고 청소년프로그램을 같이 할 정도로 발전했다.
조 신부는 89년 안식년을 맞아 수유1동성당을 떠났지만 96년 화계사 방화사건이 개신교 신자의 소행이라는 오해를 풀기 위해 한신대 학생들이 청소를 도와주면서 화계사까지 포함한 교회, 성당, 사찰이 화합하게 돼 지금에 이르고 있다.
"종파를 뛰어넘는 기 목사님의 사랑에 감동했어요. 요즘도 기 목사님과 같은 기독교장로회 목사님들을 만나면 반갑습니다." 일찍이 종교간 화해의 현장에 있었던 조 신부는 이후 전농동과 논현동 성당, 서울대교구 관리국장 등을 거치면서도 종교간 화해와 소통에 남다른 관심을 가져왔다.
"종교간 평화 없이 세계 평화 없다"는 말로 유명한 신학자 한스 큉에 공감해 '한스 큉의 신관(神觀) 연구'를 주제로 박사 학위를 받았고, 서울대교구에서 일하던 2007년에는 천주교 최초의 재무제표 공개를 실무자로서 추진하기도 했다.
조 신부는 최근 불교와 개신교간 갈등의 원인으로, 흔히 거론되는 한국 개신교의 근본주의적 성향 말고도 지구촌의 사상적 흐름과 문화에 대한 몰이해를 꼽았다. "그리스도교를 바탕으로 한 서구사회가 500년에 걸쳐 세속화, 다원화하면서 이미 정리한 문제를 우리는 이제서야 치르고 있습니다. 문화적 측면에서 진단해야 종교 갈등에 대한 처방이 나올 수 있습니다."
그가 명례방포럼 주관, 서울대교구 동서울지역(김운회 주교) 주최로 24일부터 11월26일까지 10차례에 걸쳐 역삼동성당에서 '열린사회를 위한 가톨릭 문화강좌'를 갖는 것도 종교와 문화가 서로 소통해야 한다는 평소의 생각을 반영한 것이다.
이번 문화강좌는 천주교 내에서는 드물게 최근의 문화현상을 다룬다. '무한도전의 마력과 미디어 문화의 허실'(황상민 연세대 교수), '행복한 눈물-미술의 가치와 경제적 의의'(김현화 숙명여대 교수), '신앙인과 재테크-투기인가 투자인가'(이지순 서울대 교수), '성과 속의 교차로에 선 종교'(오강남 캐나다 리자이나대 교수), '산티아고 순례와 인간의 길'(신정환 한국외대 교수) 등이 주제다.
조 신부는 "세속화, 다원화된 이 시대에는 '내 종교가 최고다'라는 말은 의미가 없어졌다"면서 "지금은 정치, 종교 외에 다양한 문화현상이 사회를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종교가 문화의 각 영역과 소통하지 않으면 올바른 좌표를 설정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남경욱 기자 kwna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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