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운 부탁이 있소."
1968년 여름 청와대 접견실. 주변을 물리고 한진그룹 창업주 조중훈 회장과 독대한 박정희 대통령이 입을 열었다.
중앙정보부장, 청와대 비서실장 등을 통해 들어온 한국항공공사 인수 요청을 정중히 거절한 터라 조 회장은 '부탁'의 내용을 짐작하고 있었다. 회사 중역들도 "한국항공공사 인수는 베트남에서 고생해 모은 돈을 밑 빠진 독에다 붓는 꼴이나 다름없다"며 완강히 반대하고있었다.
"대통령 재임 중 우리나라 국적기를 타고 해외 나들이 한번 하는 게 소망이오. 베트남에서 휴가를 나오는 장병들이 외국 비행기를 타고 있는데, 장병들의 사기도 문제지만 목숨 걸고 벌어 온 외화도 낭비되고 있소."
침묵을 깨고 대통령의 입에서 나온 부탁에 더 이상 물러설 수 없었던 조 회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조 회장은 인수에 반대하는 중역들을 설득, 그해 11월 1일 정부에 인수 의사를 정식으로 통보했다.
금융부채만 당시 금액으로 27억원을 기록하는 등 동남아 11개국 항공사 중 꼴지를 달리던 항공사가 굴지의 글로벌 항공사로 성장할 것이라고는 꿈도 꿀 수 없는 상황이었다.
올해로 창립 63주년을 맞는 한진그룹이 세계적인 종합물류기업으로 성장한 바탕에는'남이 가지 않는 길을 간다'는 도전정신과 사익에 앞서 공익을 생각한다는'수송보국(輸送報國)'의 창업철학이 깔려있다. 선대 회장은 이후 "사업을 하다 보면 금전적인 것에 연연하기보다 손익의 개념을 뛰어 넘어야 하는 경우도 있다"고 술회하기도 했다.
■ 보국에는 총탄도 무릅쓴다
한진그룹의 역사는 1945년 11월 조중훈 회장이 인천시 해안동에 '한진상사' 간판을 내걸면서 시작됐다. '한민족(韓民族) 전진(前進)'을 뜻하는 '한진(韓進)'이었다.
조 회장이 처음 시작한 일은 인천항의 화물을 화주에게 실어 나르는 일. '수송사업은 사람 몸의 혈맥과도 같다'는 지론에 따른 것으로, 신속ㆍ정확한 운송을 통해 일제 강점으로 피폐해진 국가 경제에 활력을 넣겠다는 창업주의 의지가 담긴 사업이었다.
트럭 한 대로 시작해 1950년대 주한미군 물자 수송, 1961년 서울~인천을 운행하는 한국 최초의 지정좌석 방식의 버스사업 등으로 발전을 거듭하던 한진이 한단계 발돋움 한 계기는 베트남 전쟁이었다.
1966년 베트남에 파병한 미군과 하역 및 수송계약을 체결한 뒤 5년간 베트남에서 벌어들인 돈은 1억5,000만 달러. 1인당 국민소득은 200달러 안팎, 한국은행이 보유한 외화가 5,000만 달러에 불과하던 시절이었다.
조 회장은 이후 "6ㆍ25전쟁 당시 일본이 전쟁특수라는 미 군수경기로 막대한 외화를 벌어들여 2차 세계대전의 잿더미속에서 일어선 것을 보고, 잘하면 우리도 경제성장의 속도를 가속화 시킬 계기로 판단했다"고 회고했다.
특히, 대부분의 기업들이 국내 시장을 발판으로 부를 축적한 것과 달리 해외의 전쟁와중에 사업 수완을 발휘해 기업을 성장시킨 것은 지금까지 한진의 자부심으로 남아 있다.
■ 수송, 한길만 간다
베트남전에서 군수 물자 수송으로 기틀을 다진 한진은 1971년까지 5년 동안 수송관련 자회사를 잇따라 설립하면서 종합물류기업의 기틀을 마련한다.
1967년에는 대진해운, 1968년에는 한국공항을 각각 설립했으며, 1969년에는 대한항공의 전신인 한국항공공사를 인수해 민간 항공사로서 본격적인 발걸음을 내디뎠다.
1977년에는 부실 해운사인 대한선주를 인수해 한진해운을 출범시키는 등 육해공 수송 자회사들의 설립을 통해 명실상부한 종합수송기업의 기반을 다졌다.육해공 일관수송 체제는 혁신적인 유통 수단으로 개발된 컨테이너 수송방식을 국내 처음으로 도입해 보편화시키는 계기가 됐다.
특히 국내 최초의 컨테이너 전문선사로 설립된 한진해운은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따라 급격히 늘어난 수출 물량을 소화해 '수출역군' 들의 든든한 버팀목 역할을 하기도 했다.
국내 처음으로 택배 서비스를 선보인 곳도 한진그룹이었다. 1992년 '파발마'라는 이름으로 시작한 뒤 불과 2, 3년 만에 새로운 사업으로 자리를 잡았다. 한진택배는 현재 4,000여대의 택배 차량을 보유하고 있으며, 대한항공 직항편을 이용한 전세계 2~4일 국제 택배 서비스도 하고 있다.
남이 가지 않은 길을 가되, 여러 길을 가지 않는다는 한진의 '수송외길' 경영방식은 문어발식 사업 확장의 후유증으로 적지않은 재벌들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때 더욱 빛났다. "낚싯대를 여러 개 걸쳐 놓는다고 고기를 많이 잡는 것은 아니다. 실력 있는 낚시꾼은 하나의 낚싯대로 승부를 건다"는 선대 회장의 '낚싯대 경영론'이 바탕이 됐다.
외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건설업과 조선사업이 대표적이다. 한진그룹은 1968년 해운씽?빌딩 착공 때 설립한 한일개발을 통해 국내 기업으로는 처음으로 사우디아라비아에 진출, 고속도로 공사를 진행하기도 했다. 하지만 중동 건설 붐에 따른 건설 노동자 수송에 대비한 중동취항과 영업망 확대를 위한 정지작업 성격이 강했다.
또 선대 회장은 각 분야의 사업이 안정 궤도에 오르자 조선공사를 1989년 인수, 한진중공업을 출범시켰다. 이 역시 한진해운의 늘어나는 선박 수요와 노후 선박 교체 수요에 맞추기 위한 목적이 바탕이 됐다. 2006년 한진중공업은 한진건설과 함께 계열 분리돼 독자경영을 하고 있다.
■ 수송보국, 세계로 간다
조중훈 회장이 타계한 뒤 2003년 한진그룹 회장에 취임한 조양호 회장은 제2창업 의지로 새 역사를 써 내려가고 있다. 취임 1년 후인 2004년 한진그룹의 주력 기업인 대한항공 35주년을 맞아 '세계 항공업계를 선도하는 글로벌 항공사'라는 새로운 비전'Excellence in Flight'을 선포하고 세계 최고 명품 항공사가 되겠다고 선언했다
이 같은 비전의 성과는 빠르게 나타났다. 2004년 대한항공은 국제 항공화물 수송 부문에서 세계 1위에 오른 뒤 올해까지 4년 연속 1위 자리를 지키고 있다.
2007년에는 그룹의 안정적인 유류 공급원을 확보하기 위해 S-OIL 지분 28.41%를 인수했으며, 올 8월에는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중앙아시아에 물류 거점을 확보하기 위해 우즈베키스탄 나보이 국제공항의 물류 인프라 구축사업을 시작했다. 역시 '남이 가지 않은 길'이다.
■ 대한항공 원동기정비공장 김용기 부장
"항공기 정비 잘못으로 발생한 사고가 지금까지 단 한번도 없었습니다. 정비사로서 이만큼 뿌듯한 일이 또 있겠습니까."
대한항공 원동기정비공장 김용기(54) 부장은 정비사로서의 보람을 주저없이 '무사고 정비'로 꼽았다. 1974년 대한항공 입사한 이래 34년 동안 항공기 엔진 1,000여기를 수리한 김 부장은 2000년 회사가 부여하는 '명장'의 칭호를 받은 베테랑 '엔진 정비사'다. 3,800여명의 정비사 중 '명장'의 타이틀을 가진 정비사는 김 부장이 유일하다.
김 부장의 삶의 궤적도 '가지않은 길'을 가는 한진그룹과 다르지 않다. 자동차 정비사에 대한 인식도 거의 없다시피 할 무렵 "남들과 달리 살아가겠다"며 택한 길이 항공기 정비사다. 60년대 초등학교 시절 운동장에 내려 앉은 미군 헬기에 이끌렸던 하늘에 대한 동경이 인생행로를 정한 것이다.
김 부장은 "하늘을 나는 비행기는 사소한 잘못 하나로 대형 사고로 이어진다"며 "제아무리 칠칠맞지 못한 사람도 이곳에서 정비를 하다 보면 결벽증 환자로 불릴 만큼 꼼꼼해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안전이 담보되지 않는 한 회사 운영이 불가능한 항공사 특성상 입사와 함께 정비사들의 성격이 바뀔 정도로 '정비 군기'는 상상을 초월한다. 항공기 엔진을 정비하는 원동기정비공장이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병원에 종종 비유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항공기 엔진은 통상 2만 시간을 운행하면 부천원동기정비공장으로 실려와 낱낱이 분해된다. 2,3개월에 걸쳐 1만5,000여 개의 부품 하나하나에 대한 비파괴 검사, 정밀 검사를 거친 뒤 재조립돼 새로운 엔진으로 거듭난다. 이 모든 과정에서 정비사들은 쇠붙이가 있는 복장, 목걸이 등 액세서리 등은 착용이 금지된다.
또 정비사가 사용한 공구와 분해한 부품 숫자에 대한 결산이 이뤄지지 않으면 퇴근시간은 무기한 연기된다. 수술실에서 메스나 가위의 수가 맞지 않을 경우 일이 끝나지 않는 이유와 같다.
인천공항이 개항하면서 '엔진 박사' 김 부장의 일터가 바뀌었다. 인천공항에서 운항정비공장 업무를 지원하는 일이다. 엔진을 완전 분해해 재조립하는 원동기정비공장이 병원의 수술실이라면, 운항정비공장은 항공기에 장착된 엔진에 문제가 생겼을 경우 긴급 조치를 취하는 응급실 또는 앰뷸런스에 해당한다. 한 밤중에라도 뛰어나가야 해 거주지를 공항 주변으로 스스로 제한한 이유이기도 하다.
김 부장은 "항공기의 정시 이륙을 도와야 하는 만큼 정확한 원인 파악과 빠른 손놀림이 필수"라며 "종종 해외 공항으로 급파돼 원정 정비를 하기도 하는데 얼마 전엔 싱가포르 공항에 투입돼 36시간의 작업을 거쳐 항공기를 띄우기도 했다"고 말했다.
정비사라는 직책이 조종사나 승무원들의 화려함에 가려 서운할 법도 했다. 하지만 김 부장은 "정비사가 승객의 눈에 띄면 결코 안전한 항공사라고 할 수 없다"며 "다른 사람을 부러워 해본 적도, 정비사로서의 삶을 후회해본 적도 없다"고 잘라 말했다
정민승 기자 msj@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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