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에 가족과 친지들이 모이면 100이면 100 정치 얘기가 나온다. 내가 정치부에 있다는 이유로 이것저것 물어보기도 한다. 얄팍한 지식을 총동원해 주제넘은 해설을 하곤 하는데 그때마다 답답함이 가슴 한쪽을 짓누른다. 집권한 쪽이나 반대 쪽 모두 욕할 수밖에 없는 한국 정치의 현실 때문이다. '그 잘난 정치 때문에 모처럼의 명절까지 더러운 기분으로 보내야 하나'라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면 우울함은 한층 더해진다.
그런데 올 추석 연휴도 여기서 크게 달라질 것 같지는 않다. '어청수 경찰청장은 어찌 해야 하나'라는 질문이 나올 텐데 사실 나는 그를 잘라야 할지, 놔둬야 할지 잘 모르겠다. "불교 홀대로 종교의 자유를 침해했다"는 비판론도, "자신의 일을 한 것일 뿐"이라거나 "잘못은 있지만 경질할 정도는 아니다"는 옹호론도 일리가 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현재 한국에서 사활적 과제가 바로 위험선을 넘나드는 경제를 살리는 일이라는 점이다. 여야는 어 청장 문제를 좀 긴 호흡으로 보면서 다른 생산적 쟁점에 집중해야 하는데 그런 모습은 전혀 안 보인다.
또 다른 추석 정치 화제가 될 것이 틀림없는 문국현 창조한국당 대표와 민주당 김재윤 의원에 대한 체포동의안 처리 문제도 여야 모두에게 화살을 돌릴 수밖에 없는 사안이다. 체포동의안은 5일 오후 국회에 보고됐지만 처리 시한인 8일 오후까지 본회의가 열리지 않아 처리가 사실상 무산됐다.
여당 시절인 2005년 체포동의안 처리에 시한을 두도록 국회법을 개정했던 민주당은 이 기억을 머리에서 깨끗이 삭제했는지 "야당 탄압"이라며 처리에 반대했다. 처리 방침을 정한 한나라당은 무력하게 시한이 지나는 것을 쳐다보기만 했다. 한나라당은 12월 9일 정기국회가 끝나기 전 재상정하겠다고 하지만 무척 공허해 보인다. 여야를 막론하고 '따뜻한 동료 의식'을 발휘하지 않았나 하는 의심까지 든다.
올해 가장 뜨거운 이슈였던 쇠고기 파동을 다루기 위해 7월 14일부터 이달 5일까지 열렸던 국회 쇠고기 국정조사 특위도 실망스럽기는 마찬가지다. 국정조사 결과보고서도 채택하지 못하고 경과보고서로 이를 대체했다. 그토록 국민의 관심을 받으며 출범한 특위가 그토록 국민의 외면 속에 끝을 맺을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여야는 제대로 된 증거 하나 들이밀지 못한 채 살벌한 단어들로 가득 찬 격문만 계속 써댔다.
추석 정치 화제가 또 이런 식이라면 이번엔 가족 친지들과 정치 얘기를 하지 않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가 얘기라도 꺼낼라치면 모른 척 시선을 TV로 돌려 추석특집 영화를 보거나 뒷동산에 올라 먼 곳을 바라보는 것이 정신건강에 도움이 될 것이다.
요즘 여야는 추석을 앞두고 민생투어에 여념이 없다. 그러나 대부분 그렇고 그런 이벤트일 뿐 알맹이나 메시지는 찾아 보기 어렵다. 차라리 추석 연휴 적당한 날을 잡아 함께 민생 봉사활동이라도 펼쳐 보면 어떨까. "국민들께 죄송합니다. 어쩌다 보니 할 일을 제대로 못했고, 쓸데없는 일로 많이 싸우기도 했습니다. 앞으로는 한국을 살리기 위한 아이디어로 경쟁하겠습니다." 여야가 함께 한 봉사 현장에서 이렇게 말하면 국민들도 다 믿지는 않겠지만 꽤 대견스럽게 생각할 것이다. 기분이 상하지 않는 최초의 추석 정치 화제가 될지도 모른다.
이은호 정치부 차장 leeeunh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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