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년 전인 1996년 8월에 열렸던 미국 공화당 전당대회는 지금도 나를 비롯한 공화당원 모두에게 뼈아픈 기억으로 남아 있다. 민심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성급한 승리 분위기에 휩싸인 결과 민주당 정권을 4년 더 연장해주는 실책을 저질렀기 때문이다. 그 해 전당대회는 공화당 역사상 처음으로 캘리포니아 주 남쪽 끝의 아름다운 도시 샌디에이고에서 열렸다. 샌디에이고는 바다를 끼고 멕시코와 접해 있는 국경도시로, 공기가 맑고 바닷물이 깨끗한데다 물이 차지 않은 해변으로 유명하다.
당시 민주당은 여자 문제로 크게 상처를 입은 빌 클린턴이 현역 대통령으로 재선을 노릴 때였다. 부시 시니어의 패배에 크게 상처받은 공화당은 당의 모든 에너지를 상원 원내대표인 밥 돌 의원에게 집중해 클린턴에 대한 복수를 다짐했다. 밥 돌은 도덕적으로 흠이 없는 제2차 세계대전 참전용사 출신으로, 부인인 엘리자베스 돌 역시 노동부 장관과 교통부 장관을 지낸 유명 정치인인데다 부부 간 금실이 좋기로 알려져 있는 등 당시 클린턴의 재선을 막을 수 있는 최고의 적격자였다.
부통령으로 지명된 잭 캠프 또한 미식축구 선수 출신으로 정치권에 널리 알려진 거물급이었다. 대회장인 샌디에이고에는 4년 전 텍사스 대회 때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모였고 도시 전체가 축제 분위기였다. 공화당원들 모두는 복잡한 여자관계와 나이 어린 백악관 인턴 모니카 르윈스키와의 성 추문으로 정치적, 도덕적으로 상처를 크게 받은 클린턴은 도저히 밥 돌의 적수가 될 수 없다고 믿었다.
당연히 전당대회는 대통령 후보 지명대회라기 보다는 밥 돌 대통령 당선 축하파티 같아 보였다. 실제로 그 당시 클린턴이 재선될 것으로 예측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공화당 진영은 유권자들이 설마 여기 저기서 여자들을 성희롱하고 그 것도 모자라 자기보다 무려 30살이 아래인 백악관 인턴과 자신의 집무실에서 오럴 섹스를 한 클린턴에게 4년을 더 맡길 것으로는 생각하지 못했다. 도무지 창피해서 설명조차 하기 낯뜨거운 이런 바람둥이를 어찌 전 세계의 지도자격인 미국의 대통령으로 다시 뽑을 수 있겠느냐는 게 공화당원들의 한결 같은 정서였다. 더욱이 웃기는 일은 선거 도중에도 클린턴 대통령에게 예전에 성희롱을 당했다는 여자들이 계속 새롭게 나타났다. 이런 상황에서 밥 돌 같은 훌륭한 후보를 제치고 바람둥이 클린턴이 또 당선됐다는 건 나 자신 믿을 수 없었고, 전세계 정치평론가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돌이켜 보면 당시 공화당이 참패한 이유는 전당대회 때부터 이미 대통령이 된 것처럼 너무 흥분해 축제 분위기에 너무 깊숙이 빠진 데다 국민에 대한 뚜렷한 메시지도 없었기 때문이다. 반면 클린턴은 4년 전과 똑같은 메시지로 유권자들에게 호소했다. 그는 “여러분, 4년 전 부시 행정부 때보다 여러분의 경제 사정이 나아졌다고 생각한다면 나와 함께 앞으로 4년 간 여러분의 재산을 두 배로 늘리겠습니까, 아니면 공화당의 돌 후보를 붙잡고 4년 전 어려웠던 부시 시절로 다시 돌아가겠습니까?”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우리 공화당은 오로지 도덕만을 앞세웠다. 결국은 경제만 튼튼하다면 여자 문제는 외면할 수 있다는 민심을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
샌디에이고 얘기를 하다 보니 그 지역 출신으로 한때 인기가 대단했던 듀크 커닝햄 (Duke Cunningham) 이 떠오른다. 그와 나는 같은 시기에 연방 하원에 진출했다. 커닝햄은 해군전투기 조종사로 베트남 전쟁에 참전해 베트콩의 MIG (미그기)를 격추한 전쟁 영웅으로, 나와는 각별한 친구로 지냈다. 그는 성격도 원만해서 주위에 친구도 많았다. 커닝햄은 자신의 지역구인 샌디에이고에서 열린 전당대회에서 많은 역할을 떠맡았는데, 그 중 하나로 캘리포니아 주 출신 공화당 의원들을 특별한 만찬에 초대하기도 했었다. 그는 특히 워싱턴에 있을 때 포토맥 강에 매달아 놓은 집 같이 생긴 보트(House Boat)에서 거주해 화제를 낳기도 했었다.
그런데 이 베트남전 영웅이 2006년 3월 3일, 8년 4개월의 징역형을 받고 지금 감옥살이를 하고 있다. 이유는 한 군수업 관련 업자가 국방위 소속이었던 그의 90만 달러짜리 집을 1백60만 달러에 사서 그로 하여금 70만 달러의 이익을 취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커닝햄은 64살 나이에 8년 형을 선고 받았으니, 72살이나 되어서야 출옥하게 된다. 샌디에이고 얘기만 나오면 나는 커닝햄의 건장한 체격과 웃는 얼굴 모습이 머리에 떠오른다.
미국에서는 정치인이 감옥에 가게 되면 그 것으로 정치생명이 완전히 끝난다. 국회의원이었다는 칭호를 쓸 수 없고 연금도 중단되며, 무엇보다 다시는 어떤 공직에도 출마할 수 없도록 피선거권마저 박탈당해 그야말로 폐인이 된다. 잘못된 행위로 인한 결과가 너무도 참혹하기 때문에 미국의 연방의원을 매수 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한국에서는 숱한 정치인들이 감옥에 갔다 나와도 그 것이 마치 무슨 정치적 박해 때문인 냥 호도하다가 버젓이 다시 출마하는 것은 물론이고 신기하게도 당선까지 되는 것을 보고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1996년 공화당 전당대회 때 한미 의원 친선협회의 미 의원 대표였고 한국 국회의원 대표는 오세웅 의원이었다. 현직 의원은 자연히 대의원 대우이기 때문에 언제고 전당대회장안에 들어갈 수 있었다. 들어가서 캘리포니아주 대의원들과 악수를 나누고 식사도 같이 했다.
하지만 불행히도 대의원이 아닌 다른 소위 손님들은 주로 대회장 변두리에 자리잡고 멀리서 구경하는 수밖에 없게 되어 있다. 외국에서 온 손님들도 마찬가지로 주로 밖에서 빙빙 돌며 아는 사람 만나면 악수를 나누며 담소하는 게 고작이었다.
당시 한국에서 온 국회의원들을 개회 첫날 만났다. 이곳에 와 봤자 안에도 못 들어가고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니 지루하기가 짝이 없을 텐데 뭐하러 여기까지 왔느냐고 물었다. 한국에서는 미 공화당 전당대회에 초대 받았다는 그 자체가 크고 더욱이 초대받아 전당대회에 참석했다는 사실은 더욱 그 무게가 어마어마하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귀국한 다음 한국 신문도 대서 특필할 것이고 국회안에서도 그 입지가 강해진다고 말하기도 했다. 앞으로 사흘동안 뭘 할 것이냐 물었더니 이곳 교포 동창, 친지들과 매일 골프 약속이 되어 있고 저녁마다 교포들을 대상으로 한 연설 스케쥴이 꽈 차 있다며 걱정할 게 없다는 투였다. 난 아직도 대통령 취임식은 몰라도 대한민국 국회의원들이 공화당 또는 민주당 전당대회에 참석해서 꿔다 놓은 보리 자루같이 빙빙 돌다 교포들과 함께 골프 라운딩이나 하고 갈 바엔 쓸데없이 그 많은 공금을 써 가면서 올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아침 지하철 훈남~알고보니[2585+무선인터넷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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