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발독재는 좀처럼 끝날 것 같지 않았다. 그 시절 선거는 민주주의의 희망이자 대안이었다. 이른바 '87년 체제'가 들어서자 비로소 민주주의의 이름을 제대로 부를 수 있었다. 그 때 변화의 키워드는 대통령직선제, 대통령을 직접 우리 손으로 뽑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선거만 제대로 하면 민주주의가 될 것처럼 여겼고, 가능한 한 모든 분야에서 임명제를 선출제로 바꿔야 한다고 믿으며 선거제 확대를 위해 분투했다. 공공기관의 장들은 물론 국립대의 단과대 학장조차 청와대에 선을 대야 될 수 있었던 상황에서 선거라는 말은 가히 민주주의의 판타지처럼 울림이 컸다.
각 부문에 넘치는 '선거민주화'
20여년이 지난 지금 우리나라는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선거가 만발하는 나라가 되었다. 1년 내내 모든 부문에서 크고 작은 선거가 실시되고 각양각색의 대표를 뽑고 있다. 대통령과 국회의원, 지자체의 장과 의원들은 물론 교육감까지 선거로 뽑힌다. 공공기관, 대학과 연구기관, 협회나 사회단체 등 각종 사회조직도 그 장, 대의원들을 선거 또는 선출제를 통해 뽑고 있다.
선거가 넘치다 보니 선거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부정이나 부조리는 말할 것도 없지만, 선거과잉이 가져오는 전 사회적 비효율도 만만치 않다. 학문과 지성의 전당인 대학도 주기적으로 선거몸살에 시달린다. 총장선거는 경합의 강도나 선거비용이 만만치 않은 반면, 단과대나 대학원같이 비교적 규모가 작은 조직에서 선거를 치르는 데 따르는 어려움이 적지 않다. 누가 누구를 찍을지 뻔히 알 수 있는 상황에서 선거라니, 십 수 년을 함께 해 온 사람들끼리 공약은 뭐고 또 소견, 선거운동은 또 뭔가.
선거는 그 과정 못지않게 선거 이후의 일이 중요하다. 선거를 통해 선출된 대표들이 선출해 준 사람들의 민의를 외면하거나 무시하는 것을 막을 수 없고, 소위 애프터 서비스도 사실상 기대하기 어렵다. 대통령선거처럼 단임제로 가면 재선의 인센티브가 없는 상태에서, 특히 정권 재창출이 여의치 않을 때는 독단적인 국정의 위험이나 수평적 정권교체 시 국정 단절을 가져올 우려가 있다.
그러나 보다 더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 선거는 유권자의 심판과 선택의 기회이기보다 출마하고 당선될 수 있는 능력과 여건을 갖춘 자들만을 위한 정통성 획득 게임으로 변질되고 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당선만 되면 게임 오버, 이것저것 가릴 게 없다는 게 후보들의 공통된 현실인식이다.
유권자로서는 국회의원들의 후안무치한 직무유기나 요즘 물의를 일으키고 있는 지방권력의 전횡을 뻔히 보면서도 어찌해 볼 방법이 없다. 몇 년 후 선거철이 돌아오더라도 마땅치 않은 선택을 강요 받거나 아예 투표권을 포기하고 떠나게 될 것이므로 덜 싫은 후보를 택하고 나서 금방 후회막급이 될지언정 진정한 의미의 선택이나 심판의 기회는 오지 않을 것이다. 촛불이 타오르고 꺼지지 않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일 것이다.
선거 후 민의 살리는 길 찾아야
물론 선거제도 확대는 열린 사회의 자연스런 특성이다. 선거의 종류와 양, 소요기간과 비용을 계산해 보면 민주주의의 개화 정도를 알 수 있을 터인데, 우리나라는 단연 최상위 랭킹을 차지할 것 같다. 사실 선거보다 더 나은 대안이 없는 경우가 많다. 국민의 대표기관이나 주요 공직자들을 선거를 통해 뽑는 것은 당연한 민주주의의 요청이기도 하다. 이런 저런 문제점 때문에 임명제로 되돌아가자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각종 선거를 보면 뒷말이 없는 경우가 드물다. 선거만 끝나면 유권자들은 철저히 무력화되니, 그 틈새를 비집고 언제라도 촛불이 타오르고 좀처럼 꺼지지 않는다. 이제 선거가 진정한 선택과 심판의 기회가 되게 하고 선거 사이의 기간에 국민이 주권자로서 제대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경로를 터 줄 수 있는 정치제도 개혁을 다시 한 번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 시점이 아닌가 생각한다.
홍준형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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