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5년의 국교정상화 이후 한일 양국 관계의 역사는 사과의 역사다. 대통령의 일본 방문을 비롯한 중요한 고비마다 일본은 식민지 지배에 대한 사과 표현을 찾느라 진땀을 흘렸다.
아이들 싸움 뒤의 화해라면 "미안해, 내가 나빴어" 정도로 끝날 수 있지만 국가 간의 공식 사과는 도의적, 심리적 문제로 끝나지 않는다. 일종의 '채무 승인'으로 비치어, 국제법적 책임 문제로 번질 수 있다. 모든 정치 행위에서와 마찬가지로 자국민의 시선과 집단자존심도 고려할 수밖에 없어 낮은 자세를 취하는 것만이 능사도 아니다.
상호 소통 전제돼야 의미
이 때문에 우선은 맛보기 사과 표현을 골라 물밑으로 한국 정부에 전하고 반응을 떠본다. 이를 받아 든 한국 정부의 선택도 쉽지 않다. 지나치게 일본을 압박하다가는 정상 방문을 앞둔 좋은 분위기를 해치고, 그렇다고 낮은 수준의 사과를 받아들이자니 '굴욕 외교'를 경계하는 국민의 따가운 눈총과 마주해야 한다. 성공적 정상회담을 위해서는 회담 파트너끼리의 인간적 소통도 중요하다 보니 양국 정상은 서로 상대방의 정치적 처지까지 살펴 주어야 한다. 적정 표현에 합의하기까지 양측은 물밑 줄다리기를 통해 이토록 복잡한 고차 방정식에 매달려야 했다.
그런 과정을 거친 일본의 사과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게 '유감'(遺憾)이다. '유감'의 사전적 의미는 '마음 속에 남은 감정의 응어리', 즉 말끔히 가시지 않은 서운함이나 섭섭함, 원망과 불만, 억울함 등이다. 사과와는 무관하다. 그것이 남을 나무랄 때든, 자신을 책망할 때든 가리지 않고 쓰이는 것은 영어와 일본어의 영향이다. 영어의 '유감(Regret)'은 자책하는 마음(Regretful)이나 서운함(Regrettable) 모두를 가리킨다. 둘을 가리지 않고 같은 '유감'으로 번역한 데다 일본 특유의 애매모호한 언어습관에 물든 '유감'의 양의적 어감을 그대로 갖다가 썼다.
일본의 사과는 80년대 이후 색채가 짙어지더니, 1995년 이른바 '무라야마(村山) 담화'에서 정점에 이르렀다. '유감'의 애매함을 덜기 위해 덧붙여진 '반성'이나 '깊은 반성', '겸허한 반성'이 '통절한 반성'으로 발전했고, 사죄ㆍ사과의 뜻인 '오와비'에도 '마음으로부터의'란 수식어가 붙었다. 그 이후 일본 정부의 반성과 사죄가 기껏해야 이 담화의 계승ㆍ확인에 그침으로써 결정판임을 확인시켰다. 한국에서도 발표 당시보다 지금의 평가가 높다.
무라야마 담화에는 반성과 사죄의 핵심으로 여겨지는 '진정성'이 담겼다. 우선 당시 사회당 출신 총리가 연립정권 다수파인 자민당의 반발을 최대한 견디면서 일궈냈다는 점이 그랬다. 일본의 침략과 식민지 지배라는 잘못을 '의심의 여지 없는 역사의 사실'로 인정한 자세도 돋보였다. 그런데도 3개월 뒤 김영삼 대통령의 '버르장머리' 발언이 나올 정도로 양국관계가 불편했던 당시 분위기가 정당한 평가를 가로막았다. 소통을 전제하지 않은 사과에 진정성이 담기기 어렵듯, 진실한 사과도 수용할 자세가 없으면 무의미함을 일깨운다.
'자책'없는 말은 공허해
이명박 대통령이 어제 불교계에 두 차례나 사과를 했다. 대통령이 직접 사과했으면 불교계도 속상함을 달랠 만하지만 실제 반응은 떨떠름하다. 어청수 경찰청장 퇴진 등 다른 요구가 거절된 탓도 있겠지만 사과의 풍경이 깔끔하지 않다. '유감'이란 어정쩡한 표현은 그 자체로 적절한 선택인지가 의심스럽지만, 남의 나라와도 하는 사전 물밑 소통이 없었음을 내비친다는 점에서 더 큰 문제다.
무엇보다 스스로의 잘못이나 실수에 대한 '자책'이 없어 공허하다. 대통령의 직접적 잘못이야 없지만, 국정 최고책임자로서 조기에 차단할 수 있었을 '종교편향' 논란을 여기까지 키워온 부주의와 둔한 감각은 자성해 마땅하다. 정치력 부족이 자주 거론되는 이유를 이 기회에 분명히 깨달아야 한다. 그것이 나중에라도 국민에게 대통령에 대한 '유감'을 안기지 않는 길이다.
황영식 논설위원 yshw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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