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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홍 칼럼 멀리, 그리고 깊이] 내가 평등을 지지하는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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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홍 칼럼 멀리, 그리고 깊이] 내가 평등을 지지하는 까닭

입력
2008.09.10 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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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서로 다릅니다. 날 때부터 그러합니다. 물론 빈손으로 태어나는 것이 사람이고 보면 그 발가숭이 사람이 서로 다를 까닭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 상태에서는 어떤 다름도 있을 수 없다 하여 인간은 평등한 것이고, 인간이 지닌 근원적인 권리는 누구에게나 동일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은 사람이기에 누구나 평등하게 사람대접을 받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살이가 아닙니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현실'을 몽땅 걸러낸 서술이기도 합니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같지 않습니다. 생긴 모습도 다르고, 성(性)도 다릅니다. 태어나는 때와 장소도 같지 않습니다. 부모가 다릅니다. 유전인자도 같을 수가 없습니다. 게다가 삶의 조건이 또한 다릅니다. 넉넉한 조건도 있고 각박한 조건도 있습니다. 그러니 자연히 다르게 자라게 되고, 따라서 어떤 것을 할 수 있는 기회도 공평하게 지닐 수 없고, 성취하는 일도 차이가 나기 마련이며, 이에 대한 보상도 일정할 수 없습니다.

물론 삶이 이렇게 타율적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은 주어진 삶의 조건을 넘어서는 힘을 꽤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상당한 정도 자신의 힘으로, 또는 서로 마음을 같이하고 힘을 합하여, 주어진 한계를 넓히기도 하고 넘어서기도 합니다. 그렇게 해서 할 수 있는 한 서로 같지 않은 탓에 생기는 가슴앓이나 역겨움, 어려움이나 불편을 줄이고 덜려고 애를 씁니다.

인류가 이룩해온 정치체제의 발전을 좇아보면 그렇게 힘들여 이룬 궤적을 환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다양한 수식이 붙기는 하지만 민주주의란 그러한 다름을 넘어 사람이 사람을 사람으로 대접하기 위한 평등을 실현하려는 인간의 꿈이 도달한, 그래도 아직까지는 최선의 결실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들이 사람 간의 차이를 없애지는 않습니다. 그런 자율적인 노력 때문에 오히려 더 커다란 다름이 개인 간에 생기기도 합니다. 도대체 그런 능력도 어쩌면 처음부터 동등하게 개개인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 정치제도를 비롯하여 여러 제도적 장치를 통해 인간의 평등을 구현하겠다는 간절한 소망과 노력이 부당한 차별을 줄이는 데 크게 기여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삶이 그렇게 소박하지만은 않습니다. 삶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하고 소란스러워서 우리가 바라는 평등의 이념만으로 말끔하게 다듬어지질 않습니다. 평등 때문에 자유가 억제되는 것이 하나의 예입니다.

그렇다면 오히려 불평등한 것이 '자연'이고 그것을 따르는 것이 '순리'라고 해야 옳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더 강하게 표현한다면 평등을 이루겠다는 것은 마치 물을 거슬러 흐르겠다는 억지를 부리는 것과 다르지 않게 도저히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다고 일컫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평등의 이념이 그 효용을 한 번도 인류사에서 잃어본 적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 이념은 그 비현실성에도 불구하고 차별로 인한 아픔을 고발하는 것으로는 더없이 '실용적'일 뿐만 아니라 세상을 온통 뒤엎어버리고 싶은 억울함을 토해내기에는 더할 수 없이 시원한 명제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평등을 이념적 지표로 선포하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의 삶은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꿈으로 끓어오릅니다. 또한 그것을 주창한다는 사실 만으로도 그는 의로운 힘의 권화(權化)가 됩니다. 그래서 때로 평등은 지향해야 할 이념이기보다 권력을 취하기 위한 수단으로 그 효력을 더 발휘하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리라 짐작됩니다만 바로 이 계기에서 우리는 평등을 실현하는 일이 실은 '끝없는 불평등으로 점철하는 역설'임을 역사에서 확인하곤 합니다. '평등을 위한 불평등한 힘의 행사'가 불가피하다는 것을 증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평등은 뜻밖에 허구적인 이념일 수 있습니다.

지금껏 말씀 드린 이러저러한 이유로 저는 아무래도 평등주의자의 자리에 들어서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평등의 주장은 구조적으로 기만적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비록 차이와 차별을 구분하지 못한다든지, 평등해야 하는 '본질'을 평등하지 못한 '현실'을 통해 가리고 지우려는 무기력한 태도라고 꾸중하실지라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이제까지의 논의와는 다른 근거에서 사람은 평등한 존재이고, 또 평등해야 마땅하다고 감히 주장하고자 합니다.

생각해 보십시다. 사실 모든 평등담론은 '잘났음'을 준거로 하고 있습니다. "너보다 잘났으니까!"라든지 "너 나보다 잘난 것 뭐 있니?"라든지 하는 것을 바탕으로 사람에 대한 생각이나 언행이 돋습니다. 다름과 차별이 그렇게 펼쳐집니다. 그리고 그것은 가장 윤리적인 경우, "너나 나나 다르지 않게 잘났다!"는 것으로 귀결됩니다. 그런데 그 귀결은 비현실적입니다. 왜냐하면 '잘남'은 또 다른 '잘남'과 더불어 '더 잘남'을 위한 불가피한 갈등을 낳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잘남에 근거한 평등담론은 근원적으로 자기모순을 스스로 안고 있습니다.

하지만 '못남'을 준거로 하면 평등담론이 달라집니다. "내가 너보다 못났어!"라든지 "나는 모자라!"라든지 하는 것을 바탕으로 생각이나 언행이 돋으면 그 윤리적 귀결은 "네가 나 좀 채워줘!"라든지 "너 없으면 나 못살아!"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너나 나나 다 못난 처지에 잘났다면 얼마나 잘났겠니? 못난 대로 서로 도와주면서 살아야지!"하게 되면 다름과 차이는 못된 차별에 이르기보다 서로 보완하면서 삶을 이전보다 더 조화롭게 할 수 있는 바탕이 됩니다. 그럴 것입니다. 그렇다면 못남에 근거한 평등담론은 비현실적이지 않습니다. 우리네 일상 속에 있는 소박한 삶의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 같지 않습니다. 평등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차이와 차별은 아픈 일이지만 불가피합니다. 태어날 때부터 다르지 않다고 하는 평등의 이념은 너무 소박하거나 너무 작위적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평등합니다. 그 '못남의 자리'에서 보면 철저하게 그러합니다. 작심하고 자기를 속이지 않는다면, 끝내 잘남에 함몰되지 않는다면, 못남에서의 이 평등을 부정할 사람은 하나도 없을 듯합니다.

너나없이 우리는 미망 속에 있어 깨달음에 이르기에는 먼 자리에 있는 답답하고 괴로운 존재입니다. 너나없이 우리는 죄인이어서 온전함에 이르기에는 한없이 모자라는 부끄러운 존재입니다. 그래서 모두 못났고, 모자라고, 구겨지고, 때 묻은 존재들입니다. 이 사실에서 우리는 누구나 예외일 수 없습니다. 우리는 너나없이 다를 수 없는 평등한 존재들인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못남' 때문에 우리는 서로 채워주며 살아갑니다.

이런 자리에서 저는 철저하게 평등을 지지하고 싶습니다.

정진홍 이화여대 석좌교수 ·종교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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