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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충무로와 영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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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충무로와 영화제

입력
2008.09.10 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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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에 회고록 <나는 지금도 꿈을 꾼다> 를 연재 중인 영화감독 하명중씨. 1970, 80년대를 풍미했던 그에게 어찌 '충무로 추억'이 없으랴. 때마침 그곳에서 영화제가 열리고 있어서 그런지 8일자에 그 시절 기억들을 풀어놓았다.

스타 없는, 스타가 되고 싶은 사람들로 북적대는 '스타다방'의 풍경, 새벽 첫 버스로 충무로에 도착하자마자 해장국 집으로 달려가던 스태프. 그들 중에는 지금 거장이 된 임권택 정일성도 있었고, 하명중의 형인 하길종 감독도 있었다. 장미희가 드라마 <엄마는 뿔났다> 로 새삼 인기를 누리고 있다지만, 충무로시대에 비할까.

▦영화의 '충무로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린 것은 한국전쟁이 끝나면서였다. 서울을 중심으로 한 급격한 도시화와 대중매체의 발달은 영화의 역할을 계몽과 저항의 도구에서 대중오락으로 바꾸었다. 당시 장안의 화제작이었던 이규환의 <춘향전> (1955년)과 한형모의 <자유부인> (1956년) 흥행이 기폭제가 됐다. 지방 흥행업자들이 돈 보따리를 싸 들고 스타, 청맥, 향림 다방으로 몰려들면서 충무로에는 70여 개 영화사가 자리를 잡았고, 지금보다 많은 한 해 100여 편의 영화가 만들어지고 상영됐다.

▦그러나 그런 충무로도 영화세대 교체와 투자환경의 변화에는 어쩔 수 없었다. 1980년대 말 벤처와 대기업 자본 앞에 '충무로 공동체 의식'은 낡고 비합리적인 '과거 유물'일 뿐이었다. 신세대 영화인들은 새로운 '돈'과 첨단 사무실을 찾아 강남으로 흩어졌다.

멀티플렉스의 출현은 스카라극장을 사라지게 했고, 34년 전 이장호 감독의 <별들의 고향> 에 대한 향수가 스며 있는 국도극장을 오피스텔로 바꿔 버렸고, 1961년 신상옥의 <성춘향> 을 보러 42만 명이 몰려들었던 50년 역사의 명보극장마저 한 달 전 복합문화공간으로 만들어 버렸다.

▦올해로 두 번째를 맞은 서울충무로국제영화제(3~11일)는 그렇게 잊혀져 가는 한국영화의 충무로시대를 기억하고 복원하자는 것이다. 그래서 하루가 멀다 하고 여기저기서 열리는 영화나 보고, 스타들 구경하고, 거리공연이나 즐기는 여느 영화제들과 의미가 조금은 다르다. 한국영화의 선구자인 나운규(춘사영화제)는 지방으로까지 밀려났고, 대종상도 '최고 역사와 권위'라는 수식어를 잃고 떠돌고 있는 지 오래다. 충무로영화제가 진정 복원과 부활의 마당이라면 그들까지 불러들이는 고민도 해야 한다. 그들 없는 충무로가 왠지 허전하다.

이대현 논설위원 leed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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