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일 오후 서울 중구 남창동 48의10 남대문상가 2층. '서독안경' 간판이 걸린 매장에서 고정화(75)씨가 안경테를 수리하고 있다. 땜질과 다듬기를 10여분. "한 번 써 보세요"라며 안경을 건네자 80대 단골 손님은 "새 것 같다"며 웃는다. "그냥 가시라"며 손사래 치는 그에게 노인은 "번번이 그럴 수는 없다"며 2만원을 남겨놓고 서둘러 가게를 떠났다.
46년 경력의 베테랑 안경사인 고씨는 원조 '서독안경점' 주인이다. 당시 서독에서 렌즈를 수입하던 동서의 제의로 1962년 서울 명동에 국내 최초로 '서독안경' 간판을 내걸었다.
고씨는 "내가 잘해서 그런 건지, 서독이란 이름이 좋아서인지는 몰라도 이후 곳곳에서 우리 가게와 이름 같은 안경점이 문을 열었다"고 말했다. 그는 "어떤 이는 프랜차이즈로 알고 있지만, 이름만 같을 뿐 나랑 상관은 없다"고 설명했다.
고씨는 지금 33㎡(10평형) 매장 1곳만 운영하지만, 1990년대에는 남대문시장에서 66㎡ 규모의 안경점을 3곳이나 경영했다. 그러나 외환위기 한파로 2001년 점포 3곳을 정리하고,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월 100만원이 넘는 임대료와 직원 2명의 월급 등을 주고 나면 남는 게 별로 없지만 가게 문을 닫지 않는 것은 원조 '서독안경'을 찾는 단골들 때문이다. 그는 "30년 넘은 손님이 하루 평균 10여명 가량 찾아온다"며 "단골들을 실망시킬 수 없어 자리를 비우지 못한다"고 말했다.
고씨는 "벌이가 좋을 때나 지금이나 큰 돈 벌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다"며 "입구에 걸린 '여기에 들어오는 모든 이들에게 광명을'이라는 문구처럼 손님에게 밝은 빛을 줄 수 있는 방법만 고민한다"고 덧붙였다.
고씨는 베푸는 것에 익숙하다. 91년 안경사 자격증 제도가 시행되기 이전에 '일을 배우겠다'고 찾아온 사람을 까다로운 조건 없이 모두 받아준 게 대표 사례다. 그는 "생활고를 해결하기 위해 기술을 배웠던 제자들이 전국 각지에서 40여곳의 안경점을 운영하고 있다"고 자랑했다.
93년에는 서울보건전문대 안경학과에 실습 교재용으로 700만원 상당의 렌즈를 공짜로 제공했고, 요즘도 매년 어버이날인 5월8일에는 자신이 다니는 왕십리 무학교회와 시골 교회 등에 노인용 돋보기 300개를 기부하고 있다.
고씨는 2010년까지만 안경점을 운영하고, 이후에는 필리핀에서 봉사와 선교활동을 할 생각이다. 2001년 남대문시장 매장을 정리하면서 재고로 남은 안경테 수백 개와 고가의 렌즈 가공기계를 성북구 길음동 자택에 '모셔'두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는 "필리핀에 가면 저소득층이나 죄수들에게 안경 기술을 가르치며 복음을 전파할 것"이라고 말했다. 고씨의 건강을 걱정해 필리핀 행을 말리던 부인 한점쇠(70)씨와 네 딸들도 이제는 그를 이해한단다.
고씨는 요즘 매일 1시간씩 수영을 하며 체력을 키우고 있다. 연말부터는 영어 공부도 시작할 계획이다. 고씨는 "외국에서 봉사하려면 체력과 어학실력이 중요하다"며 "80세가 넘어서도 열정적으로 일하려면 지금부터 준비해야 한다"고 밝게 웃었다.
강희경 기자 kbsta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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