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강북 후미진 곳에 사는 중학생 D. 명문으로 알려져 있는 강남구의 A고교와 강동구의 B고교에 동시에 지원할 수 있다. 추첨이라는 운에 달렸는데, 당첨될 확률은 아주 낮다. AㆍB고교 인근 동네에선 물론이거니와 서울시내 거의 대부분 중3 학생들이 1단계 지망을 할 게 뻔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AㆍB고교는 정원의 20~30%만 이런 식의 '전국구 학생'을 뽑기로 돼 있다. 하지만 D는 기분이 나쁘지 않다. 부모(주소지) 때문에 꿈도 꾸지 못했던 AㆍB고교에 응시(?)라도 할 수 있고, 실제로 합격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일이 잘못되어도 예전처럼 동네 학교에 배정될 것이니 밑져야 본전인 셈이다.
AㆍB고교 동네에 사는 중학생 C. 1단계 추첨에서 탈락되더라도 별 걱정이 없다. 2단계 일반 학교군 추첨에서 AㆍB고교에 '지역구 학생'으로 낙찰될 확률이 높으며, 그 확률은 3단계 통합 학교군 강제배정에까지 이어진다. 운이 나쁠 경우라도 바로 옆 동네에 있는 비슷한 수준의 고교는 보장돼 있다. 그러다 보니 종전보다 불리해졌다는 생각이 별로 들지 않는다. 결국 C학생들로부터 손실을 느끼지 못할 정도의 확률을 떼어내어 D학생들에게 눈에 띄는 가능성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학교로 넘어간 학군개편 부담
서울시교육청이 새로 행정 예고한 고등학교 학교군 설정안을 둘러싸고 의외로 모두가 무덤덤하다. 1974년 고교평준화 실시 이후 몇 차례의 학교군 조정이 있었는데, 그 때마다 학생과 학부모, 관련 단체들이 피웠던 난리에 비하면 조용한 반응이다. 손해를 보게 되는 쪽에서 손해를 느끼지 못하고, 그 동안 불만이 쌓였던 쪽에 가능성의 열매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고교진학을 목전에 둔 학생과 학부모들 다수가 수긍하는 방안이어서 다행이다. 하지만 세상에 공짜란 없는 법이다. 입학에서 이월된 문제들이 입학 후에 불거질 소지가 많고, 결국 각 학교의 부담으로 넘어가 버렸다. 고교의 입장에서 자율이란 이름을 붙여 '조삼모사(朝三暮四)'를 당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서울 변두리에 위치한 Z고교. 동네에서도 시큰둥하게 여기는 학교에 서울시 전체에서 1단계 지망하는 '전국구 학생'이 있을 리 없다. 결국 2ㆍ3단계인 일반 학교군과 통합 학교군 방식으로 학생들을 채우게 될 것이다. 소문은 빠른 법이다. 서울시에서 아무도 가고싶어 하지 않는 학교라고 금세 알려질 것이다. 동네에서 강제로 배정된 '지역구 학생'만으로 채워진 학교는 학생들의 수준이야 예전과 크게 다를 바 없겠지만, 괜스레 나쁜 학교라는 멍에만 하나 둘러쓰게 된다.
소위 강남의 명문이라는 Y고교. 서울시 전역에서 추첨을 통해 20~30%를 뽑는다지만 학교의 입장에선 손해가 있을 리 없다. 나머지 70~80%를 그대로 '지역구 학생'으로 채우게 될 것이고, '전국구 학생'의 경우 오히려 종전보다 더 나은 학생들이 입학할 확률이 높다. 멀리 살면서 굳이 Y고교에 가겠다고 적극적으로 선택한 학생들 중에서 추첨하기 때문이다. '전국구 학생'이 많이 지원했다는 소문으로 새로운 명예를 덤으로 얻게 될 것이다. 결국 Z고교와 Y고교 사이의 '빈익빈 부익부' 현상은 해가 갈수로 심화할 것이 뻔하다.
학력ㆍ교원평가와 맞물려 가야
서울시교육청은 이번 안을 발표하면서 "그렇기 때문에 학교간의 경쟁심리가 생기고 업그레이드를 향한 자구 노력을 열심히 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닌 것은 교육청이 가장 잘 알고 있다. 새로운 학군제는 당장 입학 불만은 줄일 수 있겠으나, 시장원리에만 맡겨놓을 경우 머지않아 고교평준화의 대원칙을 허무는 결정적 패착이 될 것이다. 교육 당국이 '거의 강제적으로' 개입하지 않을 수 없고, 그리 해야 한다고 믿는 이유다. 학생들에 대한 학력평가가 소중한 자료가 되어야 하며, 교원들에 대한 합리적인 평가도 같은 맥락에서 필요하다. 이들 세 가지는 삼위일체로 굴러가야 한다.
정병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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