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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 60년, 대표 기업의 성공DNA] <7> 집념으로 이겨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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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 60년, 대표 기업의 성공DNA] <7> 집념으로 이겨낸다

입력
2008.09.08 0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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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싼 놈으로 골라도 대당 8만원은 나간다는디…."

"아따 뭔 놈의 차가 그리 비싸다요. 그래도 내가 믿고 빌려주겄소."

"근디 지가 담보로 잡힐 것이 없는디 괜찮겄습니까?"

"그래도 내가 박 선생 한번 믿어 보겄소."

해방 직후의 어수선함이 채 가시지도 않은 1946년 4월. 경찰관 출신의 고 박인천 금호아시아나그룹 창업주는 지인을 통해 17만원(현재 3,000만원 수준)을 융통해 광주에서 16만원을 주고 미국산 중고 택시 2대를 사고 남은 돈 1만원으로 사무실을 얻었다.

'광주택시'라는 상호를 달고 운수업을 시작한 박인천 회장의 이때 나이 46세. 늦은 나이에 도전한 사업에 대해 주변에선 '무모한 모험'이라는 우려의 목소리 뿐이었다.

택시2대로 사업을 시작한 박 회장은 광복후의 피폐한 경제상황과 한국전쟁 등을 겪어내며 버스운송회사로 키웠고, 타이어 제조사와 종합무역상사, 석유화학회사 등을 잇따라 설립하며 그룹사의 면모를 갖춰갔다.

5공화국 시절 아시아나항공을 출범시키며 국내 최초로 복수 민항기 시대를 열었고, IMF외환위기를 맞아서는 공장과 부동산, 사업부 매각 등의 강도 높은 구조조정을 거쳐 위기를 극복했다. 경영체질을 개선한 금호는 국내 1위 건설사인 대우건설과 1위 물류업체인 대한통운을 잇따라 인수하며 '비상'(飛上)의 날개를 달았다.

택시 2대에서 시작해 자산 35조원에 매출 20조원, 52개 계열사를 거느린 재계 8위 그룹으로 성장한 금호아시아나그룹의 역사는 '집념과 도전'으로 일궈낸 드라마다.

■ 집념만으로 도전해 성공하다

사업수완이 좋았던 박인천 회장은 택시사업 2년만에 광주여객을 세우며 버스운수업으로 사업을 확장했다.

그러나 회사의 첫번째 위기인 한국전쟁이 발발하며 회사는 사실상 잿더미가 됐다. 박인천 회장은 그러나 전쟁 와중에서도 도처에 부서진 차체 및 부품들로 목탄(木炭)차 2대를 조립, 광주여객 재건에 나섰다. 이후 휘발유차와 디젤차로 차량을 교체하며 사세를 확장, 50년대말에 이르러 전남 최대 여객 운송업체로 키워냈다.

차량은 늘고 타이어 수요도 늘었지만 정작 타이어를 구하기가 힘들어지자 박 회장은 "이제 우리가 직접 만들어 탄다"며 자체 생산을 지시, 무작정 사업에 뛰어들었다.

무모한 도전이었을까, 처음엔 '호박타이어'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이 붙을 만큼 품질이 조악했다. 그러나 전문기술자를 영입하고 설비를 개량한 노력 끝에 군납업체로 지정을 받았고, 65년 10월에는 태국에 수출을 하며 해외시장에 첫 진출하는 쾌거를 이뤘다.

금호타이어 설립에 대해 훗날 박 회장은 "당시 타당성 조사나 자동차업계 수요 전망 등 면밀한 검토 과정도 없이 그저 해내야 한다는 집념만으로 회사 설립이 추진됐다"며 "모든게 제대로 진행되지 않아 어려움도 많았다"고 회고했다.

■ 그룹회사로 성장

1972년 어느날 당시 서강대 경제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던 박인천 회장의 장남 박성용 박사는 박 회장께 뜻밖의 제안을 했다.

"경영 효율성을 높이고 계열사를 통합 관리할 수 있는 지주회사 체제로 가야 합니다."(박성용 교수)

"그럼 그 회사는 앞으로 니가 맡아줘야 쓰겄다."(박인천 회장)

박 교수의 제안에 박인천 회장은 그해 10월 지주사인 '금호실업'을 설립하고, 박성용 교수를 부사장으로 영입, 그에게 그룹체제 출범을 맡겼다.

이듬해인 1973년 창업주 박인천 회장이 초대 그룹회장에 오르며 6개 계열사로 출범한 금호그룹은 금호실업을 지주회사로 두고 금융 철강 전기 섬유 건설업에 잇따라 진출하며 4년만인 77년에는 12개 계열사로 외형을 키웠다.

■ 땅에서 하늘로… 금호 날다

1988년 12월15일 김포공항. 아시아나항공 김동휘 기장이 미국으로 가 인수해온 '보잉737-400' 1번기가 활주로에 안착했다. 색동 줄무늬를 두른 비행기는 활주로를 서서히 이동해 환영 나온 임직원 앞에 멈춰섰다.

2대 그룹 회장에 오른 박성용 회장을 비롯한 임직원들은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아시아나 만세"를 외쳤다. 8일 뒤인 12월23일 김포발 김해행 편으로 처녀 비행한 아시아나항공은 우리나라의 복수 민항기 시대를 열었다.

■ 위기를 기회로

90년대말 불어 닥친 IMF외환위기로 금호는 한국전쟁 위기 후 두 번째 위기를 맞았다. 96년 4월 박성용 회장으로부터 회장직을 물려 받은 동생 고 박정구 회장은 상처를 도려내는 구조조정을 결정했다.

수차례 반복된 임원회의에서 고 박정구 회장은 "세계일류기업을 만들자는 선친의 유지도 우선 회사가 살아 남은 뒤의 일"이라며 "안타깝지만 비주력 부문은 과감히 털고, 팔 수 있는 자산도 처분해 새롭게 출발한다는 마음가짐을 갖자"며 구조조정의 칼을 빼들었다.

금호석유화학 카본블랙 사업부 매각을 시작으로, 중국의 금호타이어 공장, 서울 회현동 그룹사옥과 금호산업 공장부지 등은 모두 그렇게 정리된 자산들이다.

1,000%에 육박하던 부채비율도 270%대로 줄었고 계열사도 32개에서 16개로 줄며 몸집이 가벼워진 금호아시아나는 2002년 9월 고 박정구 회장의 뒤를 이어 박삼구 현 회장이 비상의 날개를 달았다.

■ 500년 영속기업을 꿈꾸다

구조조정을 마친 박삼구 회장은 항공ㆍ고속 등 운수분야와 타이어, 석유화학 부문, 레저, 금융 등 기존 사업분야의 경영 합리화를 통해 수익성 극대화에 나섰고, 한국복합물류와 호남복합물류를 계열사로 편입하는 등 관련 사업분야의 시너지 창출을 꾀했다.

취임일성으로 "주주와 고객, 시장이 모두 만족하는 최고 기업가치를 창출하겠다"고 다짐한 박삼구 회장은 2006년 시공능력 1위인 대우건설과, 올 2월 국내 최대 물류회사 대한통운을 잇따라 인수하며 금호아시아나그룹을 명실공히 재계 8위로 끌어올렸다.

박 회장의 공격 경영의 바탕엔 창업주인 고 박인천 회장으로부터 이어진 인재 경영이 뒷받침됐다.

"얼마나 유능한 인재가 모이느냐가 성공의 관건이다. 인재를 확보하기 위해 먼저 우수 인재가 금호아시아나에 들어올 수 있는 여건을 만드는 게 중요하다." 박 회장이 입버릇처럼 강조하는 말이다.

올 하반기에도 금호아시아나그룹은 1,100여명을 신규 채용할 계획이다. 최근에 불거졌던 그룹의 자금난 소문도 이제는 불식됐다. 500년 영속 기업을 향한 금호아시아나그룹의 집념과 도전은 새로운 출발선상에 섰다.

■ "메세나는 인재 양성에 대한 집념의 결정체" 내년부터 격년제로 콩쿠르 개최

올해 초 평양공연을 마친 뉴욕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북한 공연 직후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22세의 젊은 피아니스트 손열음씨와 완벽한 협연을 해 격찬을 받았다.

이날 공연의 주인공은 금호아시아나문화재단 음악영재 출신인 손열음씨. 그는 공연 뒤 "회장님(고 박성용 회장)은 친할아버지나 다름 없어요. 제가 외국 연주회에 갔다 오면 공항까지 마중 나오실 정도로 챙겨주셨죠. 독일에서 유학중인 지금도 건반을 두드릴 때면 회장님의 따뜻한 마음이 전해 오는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인재양성은 창업주인 고 박인천 회장 때부터 강조돼 온 금호아시아나그룹의 핵심 가치다. 금호의 이러한 인재양성에 대한 관심과 애정은 금호아시아나문화재단을 통한 기업의 예술ㆍ문화사업 지원사업(메세나)과 어우러져 나타나고 있다.

금호아시아나문화재단 김용연 전무는 "창업주 박인천 회장이 죽호학원과 금호문화재단을 설립하며 시작된 회사의 인재육성 프로그램은 97년 박성용 회장에 이르러 현재의 기틀이 닦여졌다"면서 "장학사업 및 음악 미술분야 지원을 통해 영재를 발굴하고 후원하는 것은 그룹의 인재양성에 대한 집념의 결정체"라고 강조했다.

김 전무는 "연주 기회를 갖기 어려운 예비 음악가들에게 연주의 장을 열어주고, 재능이 뛰어난 학생들에게는 명품 고악기를 대여해주는 악기은행도 운영하고 있다"며 "이런 지원들은 예비 음악인들의 도전 의식을 고취시키고 예술의 저변을 확대하는 역할을 한다"고 말했다.

금호아시아나문화재단이 현재 문화예술 분야에 지원하는 금액은 연 60억원 정도. 그는 사회공헌 차원의 기업 지원이 더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재단은 앞으로 지원의 내실을 다지는 동시에 인재발굴ㆍ양성을 확대하기 위해 내년부터는 콩쿠르도 열 계획이다.

김 전무는 "고 박성용 회장은 평소 '우리나라에도 세계적인 콩쿠르 대회 하나쯤은 있어야 한다'고 강조하실 정도로 콩쿠르를 통한 인재발굴ㆍ양성에 강한 집념을 보이셨다"면서 "콩쿠르 개최를 유지로 남기며 마련해둔 30억원의 기금을 활용해 내년 중 예술의전당측과 함께 격년제 콩쿠르를 개최할 것"이라고 밝혔다.

전태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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