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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터愛] 코오롱 스포츠 디자인실, 필수코스 '코오롱 등산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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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터愛] 코오롱 스포츠 디자인실, 필수코스 '코오롱 등산학교'

입력
2008.09.08 0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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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를 갖는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등산도 마찬가지라 혹자는 건강과 활력을, 혹자는 작은 깨달음을 얻고자 한다고 한다. "그저 산이 좋아(혹은 있어, 심지어 불러) 오른다"는 수사(修辭)는 내공이 받쳐줘야 가능하다. 등산 예찬론자의 산 자랑을 듣고 있노라면 몸 무겁고 폐활량이 작아 움츠리고 있는 이들에게도 산의 매력이 살포시 스며든다.

태생적으로 산을 싫어하는 사람은 그 어떤 미사여구를 동원해도 어쨌든 등산이 싫은 법이다. 만약 회사에서 원치 않는 등산을 의무적으로 강제한다면 어떤 사태가 빚어질까. 코오롱스포츠 디자인실의 김은경(37ㆍ여성 총괄) 차장, 김미영(28ㆍ남성 티셔츠 등) 대리, 신경숙(28ㆍ배낭 등 용품) 주임 등 아웃도어 디자이너 3인의 고백을 들어보자.

"그저 간단히 산만 오르는 줄 알았는데 암벽에다 몸을 묶어놓는 거에요. 아무리 회사에서 월급 받고 산다지만 내 인생에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어. 아~ 짜증."(김 대리)

"직벽(수직에 가까운 암벽)에 암벽화를 신고 서 있는 걸 상상해 보세요. 밧줄은 흔들리고 아래는 천길 낭떠러지고…. 옆에서 낙사하는 사고를 봤을 땐 정말 죽을 것 같았어요."(신 주임)

"의무 반 우려 반, 떠밀려서 등산학교에 들어갔죠. 그전엔 산은 제 삶에서 소외된 존재였어요. 집에 가고 싶어 죽겠는데, 올라가야 내려올 수 있는 극한의 아이러니…. 절벽을 타고 하강하는데 무서워 혼났죠."(김 차장)

입사 전만 해도 '등산은 조금 무거운 산보' 정도로 여겼던 여성 디자이너들에게 이 무슨 당치않은 시련이란 말인가. 무릇 의류 디자이너의 소명은 소비자를 사로잡는 색과 선의 하모니, 트렌드를 선도하는 고운 맵시의 창조일 터. 고상하게 유명 패션 쇼를 참관하고, 책상머리에 기품 있게 앉아 연구하는 디자이너에 대한 장밋빛 상상은 여지없이 무너진다.

여성 디자이너를 사지(死地)로 내몬 '코오롱등산학교'는 정규 과정이 무려 6주다. 암벽타기는 기본이고 텐트도 없이 지형지물에 기대 하룻밤을 나는 '야생 비박(biwak)'도 포함돼 있다. 게다가 다른 파트 직원은 봐줘도 디자이너는 무조건 거쳐야 하는 필수 관문이다.

그들은 아웃도어 디자이너의 숙명이라고 말한다. '산을 알아야 고객의 요구를 알고 그래야 올바른 디자인을 할 수 있다'는 일면 평범한 진리가 고된 산행에 담겨있는 것이다. 자의는 아니지만 "예쁘고 예술적인 감성에 집중했던" 디자이너들에게 산의 존재 이유가 생긴 셈이다.

내키지 않는 맘보다 녹초가 된 몸이 먼저 필요를 느꼈다. "배낭 버클을 채우니까 허리띠랑 겹쳐서 배 부분이 너무 아파요. 부드러운 허리밴드를 적용한 바지 디자인이 떠올랐죠. 등산학교가 아니었다면 몰랐을 거에요."(김 대리) "전엔 멋스러운 게 최고였어요. 근데 막상 산에 오르니까 불편한 부분이 금방 느껴져요. 함부로 옷을 만들면 안되겠구나. 사람이 다칠 수도 있겠구나. 기능을 고려해야지."(김 차장) "배낭의 어깨각도, 곡선, 하다못해 쿠션의 위치까지 보완할 곳을 몸이 말해줬어요."(신 주임)

디자인 아이디어를 자연스럽게 건네주는 산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산은 수많은 아웃도어 브랜드와 각양각색의 아이템이 전쟁을 벌이는 시장이자, 부족하고 미진한 디자인의 허점을 채워주는 학교였다. 김 차장은 "등산객이 실제 입고 쓰는 아웃도어 용품이 바로 유행이고 경쟁력이라 생각해 수량분석이나 시장조사도 꼼꼼히 하게 됐다"고 말했다. 김 대리는 "멋진 차림의 등산객을 보면 꼭 따라가서 브랜드를 확인해야 직성이 풀린다"고 웃었다.

깨달음도 얻었다. 그들은 "여성복 디자이너를 성형외과의, 아웃도어 디자이너를 외과의"에 비유했다. 의류의 주류 디자인이라 할 수 있는 여성복이 화려하고 예쁜 겉 모습을 지향한다면 아웃도어는 극한에 처한 등산객의 생명을 좌우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기능+디자인=아웃도어'라는 설명이다.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방수 등 아웃도어의 기능성 소재(예컨대 고어텍스)는 의류원단과는 다르기 때문에 제약이 많다. 기능을 해치지 않기 위해 봉제도 달리해야 하고, 애써 창작한 프린트도 잘 달라붙지 않아 애를 먹는다. 김 차장은 "섬세함은 떨어지지만 사소한 프린트 하나라도 예전엔 안되던 걸 가능케 해 기능과 디자인을 제대로 접목했을 땐 희열을 느낀다"고 했다.

다른 분야의 디자이너와 달리 사람을 보호하는 역할까지 고려해야 하니 쉴 틈이 없다. "매일 밤 11시에 퇴근하는 삶, 구토할 것 같아 상비약을 서랍에 쌓아놓고 일한다."(김 대리) "남자친구 부재(不在)가 곧 산재(産災)."(신 주임) 공교롭게도 셋 다 미혼이다. 본업은 아니지만 수시로 판매일지를 확인하고 자수색깔까지 지정하는 등 일은 愿蜀甄? 연봉은 일반 디자이너의 80% 수준이란다. 그래도 좋아서 하는 일, 후회 따위는 없다.

어느덧 그들에게 산은 스승이 되고, 연인이 되고, 동료가 되고, 벗이 됐다. 살다 보면 죽어도 싫던 일이 어느 순간 일상의 더 없는 취미나 존재로 발전하는 법이다. "비박하면 별도 볼 수 있고 동호회원의 끈끈한 정도 느낄 수 있고…."(김 대리)

평소 하이힐 신고 배낭을 멜 정도로 자신의 일에 자부심이 대단한 등산용품 담당 신 주임은 "최고의 제품을 만들겠다"는 꿈도 잉태했다. "최대한 가벼운 원단을 써 좀더 가볍고 피로를 누적하지 않는 배낭을 만들 겁니다."

시나브로 산을 닮아간다는 그들은 이제 단합대회도 산에서 한다. 흠뻑 땀 흘린 뒤 평상에 앉아 즐기는 막걸리와 파전, 오리백숙이 늘 그립다. 아마 그 나른한 자리에서도 일은 놓지않을 것이다. "오늘 올라보니까 등산화 신상품이 조금 미끄럽더라." 그리고 세상에게 한마디. "아웃도어에 디자인이 없다는 편견은 버리세요."

고찬유 기자 jutda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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