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 8월27일 마케도니아 공화국 스코플레 지방의 알바니아인 부모사이에서 한 아이가 태어났다. '곤자(꽃망울)'라는 예쁜 이름을 가졌던 그 아이는 자라서 그 이름처럼 아름다운 삶을 살다가 87세가 된 1997년 9월5일 선종(善終: 죽음을 뜻하는 가톨릭 용어로, 선하게 살다가 복되게 생을 마친다는 뜻을 담고 있다)에 들었다. 그날, 전 세계는 슬픔에 잠겼고, 세계 언론은 "가난한 이들의 어머니, 살아있는 성녀, 만인의 어머니를 잃었다"고 애도하였다. 종교 이념 피부색 등을 초월하여 모든 이들로부터 큰 사랑과 존경을 받은 그 분, 오늘은 데레사 수녀께서 선종에 드신지 11주년이 되는 날이다.
'나눔과 섬김'을 실천한 삶
데레사 수녀는 한평생 인도 콜카타의 빈민촌에서 버림받고 굶주린 이, 가난과 고통에 짓눌린 이들을 위해 헌신의 삶을 살았다. 종교 이념 피부색 등은 그 헌신 앞에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 헌신적인 삶에 감동한 한 힌두교 신자는 "수녀님, 그렇게 일하시는 힘이 수녀님의 종교에서 나온다면, 그것이 진정한 종교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라고 고백하였다고 한다.
이렇듯 위대한 헌신의 삶을 산 데레사 수녀지만, 헌신의 시작은 작은 것의 실천에 있었다. "나눔이란 숟가락 하나 더, 밥 한 그릇 더 놓는 일/우리는 이 세상에서 위대한 일을 할 수 없다/단지 위대한 사랑을 갖고 작은 일을 할 수 있을 뿐이다"라고 데레사 수녀는 고백한다. 이러한 일화도 있다. 어떤 사람이 데레사 수녀에게 물었다."하느님이 계시는데 왜 세상에는 가난하고 고통 받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나누지 않고 사랑을 실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가 또 물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가난을 해결하고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 수 있습니까?""당신을 포함해 우리 모두가 서로 조금씩 나누면 됩니다"
모두가 서로 조금씩 나누는 세상, 나눔과 섬김이 충만한 세상, 데레사 수녀가 꿈꾼 그 세상은 불교에서 말하는 동체대비(同體大悲)의 세상과 다르지 않다고 하면 지나친 비약일까? 불심즉 자비심(佛心卽 慈悲心)이라고 한다. 자(慈)는 함께 기뻐하는 마음이요, 비(悲)는 함께 슬퍼하는 마음이다. 이웃이 기쁠 때는 함께 기뻐하고, 이웃이 슬플 때는 함께 슬퍼하는 마음. 자비심의 실천은 '나와 남이 하나'라는 동체대비심(同體大悲心)을 이룬다.
종교마다 계율이 다르고 섬기는 신의 존재가 다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종교적 삶의 실천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사랑과 자비, 나눔과 섬김을 통하여 더 나은 세상을 만들라는 가르침은 다르지 않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과 '이웃과 네 몸이 한 몸이라는 동체대비심을 가지라'는 말씀은 분명 같은 뜻을 담고 있다. 이러한 이해를 통하여 종교들도 상생과 조화의 길로 가야하지 않을까?
새 정부는 고위직에 개신교 신자가 참 많은데, 그 분들이 공 사석을 막론하고 자기 부처의 복음화, 개신교화를 강조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불교를 무시하는 듯한 일도 발생하여 불교와 불편한 관계에 있다. 필자도 개신교인이기는 하지만, 공무원이 공과 사를 구분하지 않고 특정종교에 치우치는 행위를 하는 것은 국민들이 공무를 위임한 취지와 뜻을 벗어나는 일로 옳지 않다. 공무원은 상생과 조화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형평성을 가지고 다른 종교를 대해야 한다. 종교적 신념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 어렵거나, 싫다면 공무를 물러나면 된다.
종교 간 '상생과 조화'이뤄야
데레사 수녀는 "당신을 설교하지 않고/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내가 하는 일에 공감하는 영향력으로/당신을 전하게 하소서"라고 기도하였다. 종교인들이 말보다는 나눔과 섬김의 삶을 실천함으로써, 그리하여 그러한 삶에 비종교인들이 공감하는 영향력으로 전도를 한다면, 나아가 종교 간에 그러한 선의의 경쟁을 한다면, 혼돈의 이 세상이 좀 더 나아지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변환철 중앙대 법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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