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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영 기자의 Who's Now] 영원한 현역 소설가 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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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영 기자의 Who's Now] 영원한 현역 소설가 황석영

입력
2008.09.05 0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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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그는 문학사(文學史)의 편애를 받은 복된 작가였다. 생애는 파란만장했으나, 시대와 함께 호흡한 그의 문학은 평단과 대중으로부터 치우침 없는 사랑을 받았다. 어느덧 문필활동 40여년. 여전히 현역작가로 붓놀림이 유려한 행복한 작가, 그는 황석영(65)이다.

그가 인터넷 포털사이트 네이버에 연재했던 소설 <개밥바라기별> 이 서점가에 잔잔한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노년의 거장이 뒤돌아본 사춘기의 갈등과 방황이 반세기 가까운 시차를 두고 이 시대 어린 청춘들의 가슴에 풍랑을 일으킨 탓이다.

청바지에 흰 남방 차림으로 40대의 인상을 풍기며 약속장소에 나타난 그는 과연 걸출한 입담의 소유자였다. 질문이 끝나지 않아도 대답이 먼저 나오니 이 얼마나 후련한가. '황구라'라는 별명은 역시 거저 얻어진 게 아니었다.

- 오늘 인터뷰는 아주 기대가 큽니다. 조선의 '3대 구라'를 직접 만나는 자리여서요.

"하하하하하. 그래요? 구라도 '3대 라지오'(라디오)가 있고, '3대 교육방송'이 있잖아. 교육방송은 1대가 이어령, 2대가 도올 김용옥이고, 3대가 유홍준. 라지오 3대는 백기완, 방배추, 황석영. 그게 분파로 쫙 갈렸어요."

- 혹시 3대 구라가 다 같이 모여보신 적 있으세요? 누가 제일 세던가요?

"다 같이 모인 적은 없는데, 최근에 50대 후배들이 주축이 돼서 '세기의 대결'이 추진되고 있어요. 70년대에 방구라하고 나하고 대결을 했거든. 그때 막상막하로 가다가 막판에 내가 깨졌지. 그래서 이번엔 모두 모여서 21세기의 대결을 한번 하자. 표를 한 장에 10만원씩 한정판으로 팔아서.(웃음) 날짜 정해지면 새로운 레퍼토리 연습도 하고 그래야 돼요."

- 새 책 <개밥바라기별> 이 출간 한 달 만에 11만부나 팔렸다고 하던데요. 베스트셀러 2위더라구요.

"그러게 말야. 아이들한테 그렇게 팔려나가는 모양이지? 고등학생, 사춘기, 20대 고 아이들인데, 요새 내가 고무적인 건 이 젊고 새로운 독자들이에요."

- 소설이 선생님 어린 시절 얘기잖아요. 그래서 든 생각인데, 만약 선생님 자제분이 선생님처럼 학교를 때려치우고 산 속을 헤매고 다닌다면 어떨 것 같으세요? 사람이 나이가 들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보수화되는 부분이 있잖아요.

"아, 속상하겠죠. 그래서 내가 어머니한테 정말 미안하더라구요. 이걸 쓰다 보니까 내가 우리 어머니를 얼마나 속 썩였는지, 그 40대 과부가 참 대단했다 하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정말 처음으로 어머니한테 바친다고 헌사를 했는데, 쓰다 보면 울컥 하고 그랬어요.

우리 큰 아이도 나처럼 고등학교 때 퇴학을 맞았어요. 근데 나랑 다른 게 나는 자유주의적인 그런 거였지만, 걔는 광주에서 (5ㆍ18 민주화항쟁을) 겪었잖아요, 꼬마 때. 그리고 우리 집에 맨날 드나든 게 그런 삼촌들이니까 영향을 받아서는 고등학교 때 전고협을 구성하다가 걸려서 잘렸어.

근데 그놈도 검정고시 봐서 대학 들어갔어요. 나랑 비슷한 길을 간 거지. 지금은 제일 유명한 국악 작곡가예요. 재즈밴드도 지가 갖고 있고." (퓨전음악밴드 '우주낙타'를 이끌고 있는 그의 장남 황호준씨 얘기다.)

- 아주 젊은 시절부터 문학사(文學史)의 제대로 된 대접을 받은 거의 유일한 작가시잖아요.

"그렇죠. 그리고 지금까지 현역으로 계속해왔다는 것. 그것 보면 참 운도 좋았어요. 그게 아마 중간에 10여년 이상 쫓겨나서 가로 돌고 징역 가고 그런 과정이 정신적으로도 그렇고 건강상으로도 피가 되고 살이 됐던 것 같애요. 왜냐면 그 중간에 빠져 있었으니까. 그때 계속 어울려서 술 먹은 놈들은 다들 빌빌하고 있거든. 하하하.

또 하나는 사회 변화과정을 객관적으로 지켜볼 수 있었다는 것, 그것도 해외에서. 좋은 기회가 됐죠. 어쨌든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그게 다 문학적 우여곡절이었다고 생각이 되기 때문에 문학을 수업하는 과정이었다고 봐요.

글을 못 쓰고 있는 동안 형식에 대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됐거든요. 그게 아마 지금 하반기 문학의 밑천이 되지 않았나 싶어요. 나는 앞으로 죽을 때까지 다 써도 못 쓸 만큼의 얘깃거리들을 갖고 있거든. 레퍼토리가 너무 많아서 출판사에 물어볼 정도야. 야, 뭐부터 줄까?" (웃음)

- 보통 장편소설들을 신문 연재를 통해 생산해내셨고, 이번 소설도 인터넷 연재 작품이잖아요. 근데 그 연재 스트레스라는 게 어마어마하지 않습니까? 원고 펑크 내고 늦기로도 악명 높으신데.

"내가 한국일보에 <장길산> 연재할 때 원고 '빵꾸' 내서 기자들 내지는 데스크를 아주 골치 아프게 한 건 사실이지만, 요샌 거의 '생활의 달인' 식으로 됐어요. 옛날에 빵꾸 내는 과정을 보면 새벽녘까지 한 줄도 못 쓰고, 괜히 자료들 뒤지고 그래요.

두 세줄 쓰다가 찢고 그러다가 때려치고 나가서 방황을 하죠, 새벽거리를. 그리곤 저 모퉁이의 대폿집, 해장국집 가서 술국 시켜서 소주 한 병 훌쩍훌쩍 마시면서 별 생각을 다 하는 거예요.

난 재주가 없구나, 소설 때려치워야겠다, 내일 당장 공고를 내서 난 소설가를 폐업한다 그래야겠다, 뭐 별 절망적인 생각을 다하고 헤매다가 들어와서 자요. 자고 일어나면 좀 나아져있는 거예요.

근데 요새는 무조건 안 돼도 그냥 책상머리에 앉아있어요. 그럼 막혀있다가도 한 시간쯤 생각을 하면 또 생각이 나요. 그러니까 지금은 일정 분량을 일정 기간에 써내야겠다 그러면 쓰는 거야, 딱. 수수해졌다고 할까, 작품을 대하는 태도가. 이번에 잘 못 쓰면 다음에 고치거나 다음 작품 잘 쓰지 뭐.

이건 유명한 얘긴데 어떤 선배가 하도 내 원고가 딱딱 제 날짜에 맞춰서 들어오니까 놀래가지고 그러더래. '황석영이를 봐라. 한국 교도행정의 일대 승리다.' 하하하."

- 젊은 작가들한텐 대중성과 작품성을 두루 갖춘 작가라는 점이 참 닮고 싶은 점일 것 같아요.

"그걸 '중박'이라고 그러죠. 내 인생은 중박인생이야. 대박을 하려면 죄를 많이 지어야 돼. 욕과 얼룩도 어느 정도 묻혀야 되고. 그걸 좀 피하면서 문학성과 대중성을 견지하려면 그게 한 중박 정도 돼요. 근

데 뭐 중박 정도만 해도 품위를 지키면서 작가 생활 할 수 있고, 먹고 살 만해요. 그걸 유지하면 되는 거야. 굳이 욕심 내서 대박으로 가거나 뭘 고수한다고 혼자 써서 쪽박으로 가는 길, 쪽박과 대박 사이 중박을 유지한다는 균형이 굉장히 힘들면서도 기량이 없으면 못하죠. 그러니까 내가 기량이 있는 사람이라는 얘기지. 하하하."

그의 생애는 가팔랐다. 민주화운동, 방북, 망명, 수감 등 현대사의 굴곡을 고스란히 생의 이력에 포갰다. 그래서인지 그의 소설은 윌리엄 포크너 식의 상상의 세계보다 헤밍웨이의 체험의 세계에 보다 가까워 보인다. 그가 양쪽의 세계를 모두 아울렀음에도.

- 참 파란만장한 생애를 사셨어요.

"난 난민으로 태어나 늘 '이동'하는 삶을 살았어요. 늘 경계에 서고. 디아스포라(이산)라고 하면 너무 추상적이고, 레퓨지(난민)라고 해야 맞아.

장춘에서 태어나서 해방 후 고국으로 귀국, 평양에 있다가 분단 직전에 38선 넘어서 남쪽으로 오니까 피난민, 조금 있다가 학교 들어가자 마자 6ㆍ25 터져서 피난지 전전하다가 또 전후복구 시절을 넘기고, 그랬더니 또 4ㆍ19 꽝, 5ㆍ16 꽝, 그러고선 청년이 되면서 군대 가서 베트남 전쟁 끌려가고….

태평양전쟁, 한국전쟁, 베트남전쟁, 전쟁을 세 차례 겪은 거예요. 그리고 돌아와서 민주화운동, 또 광주항쟁, 또 방북, 베를린 갔더니 베를린 장벽 무너지고, 망명. 돌아다니다 와선 징역 살고, 뭐 그런 연속에 있죠.

내 중단편 전집 뒤에 약력을 보면 하여튼 1~2년에 한번씩 큰 변화가 있더라고. 누가 그걸 보더니 그래요. 야, 그걸 다큐멘터리로 만들면 동아시아 현대사가 되겠다."

- 그 많은 사건들이 제각각 영향을 끼쳤겠지만, 가장 중요한 생애의 사건을 꼽으라면 뭐가 1순위에 올까요?

"베를린장벽 무너지는 거 보면서 서구사회가 변화하는 걸 본 게 가장 큰 소득이었죠. 베를린에서 2년 반 망명하고 있으면서 굉장히 성숙해졌어요. 왜냐면 방북을 하고 나서 남북 양쪽의 국가주의적 체제로부터 왕따 당했잖아요.

어디 설 데도 없고. 게다가 장벽이 무너지면서 사람들이 인위적으로 만들어놨던 여러 가지 제약들이 흩어지고 변화해가는 과정을 봤고요. 거기서 개인과 일상이라는 가치들을 재발견했죠. 그때 이미 후반기 문학의 여러 가지 구상들을 시작하거든요."

- 방북을 1순위로 꼽으실 줄 알았어요. 워낙 큰 타격을 입은 사건이라. 당시 북한 가실 때는 어떤 각오셨나요? 그런 파장을 예상 못 하셨나요?

"거의 못했죠. 그때 노태우 정부가 7ㆍ7선언을 하고 남북교류를 자유화하겠다고 발표했던 때니까. 그때 전대협, 전농, 전노협 등 전국화된 단체들이 '전씨 5형제'라고 있었거든요. 문익환 목사가 의장단의 대표였고, 내가 대변인이었는데, 내가 지방 가 있는 사이에 방북이 결정됐어요.

그걸 뭐 나이든 놈이 안 가겠다고 할 수도 없고, 그래 가보자 했죠. 그냥 귀싸대기 몇 대 맞고 끝날 줄 알았지 뭐, 이렇게 길어질 줄 알았나. 알았으면 안 갔지. (웃음)

그런데 거기 갔다가 나와서 베를린 있을 때 보니까 우리 방북을 결정했던 새끼들이 다 뿔뿔이 흩어져서 제도 정치권으로 들어가버렸더라고. 나만 말이야, 게임 후 헹가래 치고선 확 던져놓고 불 꺼진 운동장에 허리 다쳐 혼자 누워있는 그런 꼴이 됐지."

- 최근 촛불집회에 비판적인 발언을 하셔서 화제가 되셨어요.

"중도에서 살짝 삐딱한 거, 그게 난데 젊은 놈들은 불만이지, 그게. 타도하는 데 같이 가자고 하는데, 그럼 '야 이 새끼야, 느이들이 뽑지를 말든가, 투표를 열심히 하든가, 둘 다 안 해놓고 이제 와서 그걸 뒤집으면 뭘 어떡할래? 그 施?군인이 잡을 텐데.' 헌정질서 거부하고 박살내면 군인이 나올 명분이 생깁니다. 우린 무력이 50만이나 됩니다, 그것도 서울 지척에.

근데 애들이 그걸 몰라요, 철이 없어서. 헌정질서라는 게 우리가 피땀을 흘려서 여기까지 온 건데 그거 엎어버리면 그 다음엔 다른 세력들도 그렇게 할 거 아니냐 이거죠. 우리가 겪어봤잖아요. 이 질서, 형식적 민주주의 이건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거든. 그랬더니, 야, 이건 누구를 위한 거냐, 또 이러면서 욕을 먹는 거죠."

- 이런 저런 나라 걱정들, 작품활동 말고 다른 방식으로 해보실 계획 같은 건 없으세요?

"그래서 미디어를 하나 해볼까 해요. 내가 지금 작품을 1년마다 내놨기 때문에 좀 텀을 가지려고 하거든. 새로운 작품은 내년 연말쯤 시작할까 하는데 그때까지 시간이 많이 남잖아요. 인터넷으로 하는 문화매거진을 창간하려고 해요,

친구들하고. 거의 합의가 끝나고 이제 금년 안으로 착수를 하려고 합니다. 이를테면 70년대 문화운동 선언을 했듯이 이제 인터넷 문화운동을 하는 거죠."

- 고은 선생님과 함께 유력한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시잖아요. 항간에는 선생님께서 유럽에 체류하신 게 노벨문학상을 위한 네트워크 구축을 위해서라는 말도 있었어요.

"아냐, 아냐. 나는 사실 관심이 없어요. 노벨문학상이라는 게 웃기는 게 뭐냐면, 한국이 이제 시작이에요. 그게 무슨 월드컵도 아니고, 올림픽 하는 것도 아니고…. 한국은 문화적 마인드도 전혀 없고 국제적으로 자기 문화를 알리려는 노력도 전혀 없어요. 일본은 자기 문화를 서구에 알린 한 100년 한 뒤에 노벨상도 타고 그랬어요."

그는 끊었다던 담배를 인터뷰 중간중간 다시 물었다. 그러면서 "아, 우리 마누라가 이거 알면 혼나는데"라는 말을 자동 후렴구처럼 반복했다. 20세 연하의 세 번째 아내는 그렇게 자연스럽게 대화 속으로 불러들여졌다.

- 아니, 왜 이렇게 공처가세요?

(웃으며) "무서워. 나 요번에 또 짤리면 어디로 가란 말이야. 하하하."

- 선생님은 아들로선…?

"불효자지."

- 남편으로선…?

"거의 기초적인 것도 해오지 않는 사람. 요샌 둘이 사니까 조금 시늉을 하는데도 굉장히 힘드네요. 공처가라고 언뜻 비쳤지만, 그렇게 해야 되잖아. 화도 좀 내지 말아야 되고, 집에 좀 있어야 되고, 때때로 데리고 어디도 댕겨야 되고."

- 소설가 황석영 말고 생활인, 자연인 황석영은 어떻게 평가하시나요?

"그건 생각할 수가 없는데. 나는 거의 살아있는 것의 목적이나 목표가 문학인 거 같애. 그런 얘길 예전에는 창피해서 못했어요. 그런데 중요한 때마다 어려울 때마다, 내가 바탕이 기독교인이니까 절대자한테 기도를 하는데, 가령 베트남 가서 구정물에 막 구르면서 폭탄 터질 때면, 날 살려주면 내 좋은 작품 쓰겠다, 살아남게 해주라, 기도를 했어요.

감옥에서도 어려울 때, 내 나가서 좋은 작품 쓰도록 해달라고 기도를 했고. 그러니까 소설가가 되지 않았으면 굉장히 무능했을 거란 생각이 들어. 난 다른 건 할 줄 모르거든."

- <개밥바라기별> 에 보면 "나는 아무렇게나 마구 살았다"라는 구절이 있어요. 살면서 하고 싶은데 못하고 안 했던 것이 있나요?

"거의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저지르고 싶은 대로 저지르고 살았죠. 그런데 못했던 것도 있어요. 어린이날 아이들 데리고 공원에 가서 가족이 논다든가 그런 거 안 해봤죠. 할 수 있는 건데 어떻게 못했어. 틈이 없었어요."

- 문학사의 황석영 챕터가 어떻게 기록되길 바라세요?

"글쎄 그건 내가 할 바는 없는데, 다만 나는 시대와 함께 소멸하고 싶어요. 시대와 함께 기억되고. 나는 이문구 작가를 참 좋아하는데, 그가 그런 식으로 태도를 정해서 죽을 때도 그렇게 죽었어요. 문학상도 안 만들고 기념관도 안 만들고 문학마을도 안 만들었죠. 나도 그렇게 할 겁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자기 문학이라든가 문학의 완성도라든가 문학사에서의 앞으로의 위상이라든가 그런 것에 대한 두려움이나 욕심이 전혀 없게 되죠. 솔직히 그건 없어요. 대신 지금 현재 글 쓰는 거, 새로운 작품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 차 있어요.

요샌 문청 시절하고 똑같아, 그 열정이. 거의 뭐 소설 쓰기에 미쳐있다고 할까. 나 요새 쓰고 싶어 죽겠어. 그런데 좀 텀을 가지려고 해요. 너무 자주 내면 독자들이 나이든 게 말야, 자발없이 왕거미 똥구멍에서 거미줄 뽑듯이 한다고 할 거 아냐? 하하하."

aurevoir@hk.co.kr사진 신상순기자 ssshi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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