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진행이 단선적일 수야 없겠지만, 이명박 정권의 가파른 반동개혁은 걱정스럽다. 제6공화국의 두 번째 집권자 김영삼이 한국정치에서 군부의 생식선을 제거해낸 이래, 한국인들의 정치적 자유는 발랄하게 뻗어나갔다. 보수신문들이 뭐라고 투덜댔든, 김대중 노무현 시대에 한국 언론은 무람없이 자유를 누렸다.
경제적 최약자들의 정치적 몸부림이 더러 표독스럽게(다시 말해 반민주적으로) 억눌리기는 했으나, 그 두 자유주의 정권은 시민들이 누릴 수 있는 자유의 폭을 빠른 속도로 넓혔다. 그와 함께, 소위 '공안정국'이라는 말이 신문에서 사라졌다.
기지개 켜는 국가보안법
그러나 최근의 사회주의노동자연합(사노련) 사건에서 보듯, 야릇한 기시감(旣視感)과 함께 이 불길한 말이 역사의 박물관에서 밖으로 기어 나오고 있다. 이 정권은 촛불집회가 장기화하면서 지지율이 곤두박질치자, 낡아빠진 레드 콤플렉스 깃발을 다시 쳐들기로 한 모양이다. 그런데 이 희비극적 사태는, 사노련 운영위원장 오세철이 지적했듯, 그 책임의 작지 않은 부분이 김대중 노무현 정권에 있다. 특히 과반 의석을 차지하고도 국가보안법 하나 없애지 못한 노무현 정권은 크게 비판 받아야 한다.
보안법 문제를 정면 돌파하기보다 소위 '사문화론(死文化論)'을 내세우며 어물쩍 넘어가던 당시의 여권을 나는 이 자리에서 이렇게 비판한 적 있다. "주로 지금의 집권세력 한 쪽에서 나오는 사문화론은, 보안법이 악법이기는 하지만 실제론 거의 작동하고 있지 않으니 굳이 이 법을 놓고 분란을 일으킬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런 편의주의자들이 잊고 있거나 모른 체하고 있는 것은, 한 순간 사문화한 듯 보이는 보안법이 정권담당자나 사법부의 변덕에 따라 언제든지 되살아나 사람들을 선택적으로 처벌할 가능성이다. 악법의 적용을 삼가는 '좋은 정권'과 '좋은 검찰'과 '좋은 사법부'를 기대하고 악법을 놓아두자는 주장은 법의 지배를 포기하자는 것이다."(05/03/31)
내게 무슨 '혜안'이라도 있었다고 젠 체하려는 것이 아니다. 막 어섯눈뜬 10대 소녀들도 이해할 법한 이 간단한 이치를 당시의 여권이 모른 체 했다는 데 화가 난다는 것이다. 겨우 두 번 대선에서, 그것도 가까스로 이긴 처지에, 자기들 정권이 영원할 줄 알았던 모양이다. 보안법을 양보하고 무슨 대단한 민생입법을 받아낸 것도 아니다. 그들은 소리 높여 '개혁'을 외칠 줄만 알았지, 그 개혁을 무를 수 없을 정도로 제도화하는 데는 무심했다.
그 결과는 법의 자의적 남용을 통해 시민의 기본권을 억누르고 시장 숭배를 통해 사회 양극화의 심화를 굳건히 제도화하려는 반동 자본가 정권의 등장이다. 이명박 정권은, 앞선 세 정권의 진화를 거슬러 오르며 노태우 정권으로 퇴행하고 있다. 노태우 정권의 개혁과 이명박 정권의 반동개혁은 유사권위주의적 자본가 정권이라는 지점에서 만난다. 1990년 3당 합당 이후의 민자당과 당시 민주당(평민당)의 원내 세(勢)도 지금과 엇비슷하다.
노태우 정권으로의 퇴행
그러나 사정은 지금이 더 나쁘다. 노태우 정권 때의 개혁파는 공세를 취할 만한 대의와 지지기반이 있었다. 정권 쪽에서도 일정한 한계를 넘지 않는 선에선 양보할 의사가 있었다. 그 시절, 유사권위주의 정권과 보수신문들의 동맹은 지금처럼 견고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의 소위 개혁세력은 수세에 처해 있다. 이미 정권의 그늘 아래 들어간 듯한 공영방송사에서 노태우 정권 때와 같은 대규모의 방송민주화운동이 일어난다 해도, 그 당시처럼 여론의 호응이 클지 의심스럽다. 정권 역시, 설령 물리력을 사용하지 않는다 해도, '재능 넘치고 영혼 없는' 법률가들을 동원해 방송사 내의 민주파를 압살할 것이다. 지난여름의 폭염에서 열기보다 한기가 더 느껴졌던 이유가 거기 있다.
올 겨울은 또 얼마나 추울까. 겨울은 없는 사람들에게 가장 힘겨운 계절인데.
고종석 객원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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